밴쿠버를 떠나기 전 나는 한 달 정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몇 달 전 한국에 들렀을 때 처음 만난 친구였는데 직접 얼굴을 본 게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너무 즐거웠다. 한국에 다녀온 지 금세 몇 달이 또 지나있었고 우리는 할 말이 제법 많았던 것도 같다. 그날은 친구와 글을 쓰는 것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 건지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넘어갔고 친구는 나에게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종종 피드에서 책 관련 포스팅을 보기도 했고 제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친구는 내가 좋아할 거 같다면서 그냥 읽어보기를 권했고 며칠 뒤 나는 그 책을 금세 다 읽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책은 어떤 학자의 이야기인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을 무렵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고 개인의 서사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이야기들에 매료되어 한동안 나는 이 책을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멈추게 되었던 지점들을 메모해 둔 것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책에서 나오는 낙관적 태도와 그 안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안겨주는 긍정성에 대해 메모를 해두었다. 학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찾고야 말겠다는 것에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사실 이것만 보면 흔한 자기 계발서에서 나올법한 자기 암시 같기도 하다. 하지만 흥미로웠던 지점은 그 긍정에서 오는 착각과 그것이 바로 기만과 낙관의 차이가 된다는 지점이었다. 뭐든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결국 광기가 서린 어떤 지점과 한 끗 차이가 아닐까. 그래도 그 학자는 어쨌든 평생을 자신이 믿는 것에 누구보다 강한 확신이 있었고 세상을 떠나면서도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발견한 것들이 옳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세상을 혹은 누군가를 기만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라면 막연한 믿음은 기만을 먹고 자라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영화 <메기>를 보았다. 영화 <메기>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학자의 낙관적 태도와 긍정에서 오는 믿음이 기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다가 본 영화가 마침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화는 누군가 몰래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가 이런 걸 찍었는지가 아니라 저게 누구인지 의심하고 궁금해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윤영과 성원이 있다. 이 커플도 이 엑스레이의 주인공이 자신들이 아닐지 생각한다. 하지만 알 수 없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윤영이 성원을 그리고 성원은 후배를 믿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연결된다. 윤영은 믿었던 성원의 과거 연인에게 했던 행동을 듣고 그에 대한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다. 성원은 윤영이 선물해 준 반지를 잃어버리고 후배에 맨발에 끼워진 반지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보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깨지기 시작하는 믿음과 타인에 대한 의심이 쉬이 거두어지지 않는 과정을 보면서 그 이후에도 나는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봤다. 믿음은 생기는 것보다 깨지는 것이 훨씬 더 쉬우며 의심이 믿음이 되는 건 어려워도 믿음이 의심이 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갖는 믿음과 타인의 관계에서 오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얼마 전 나는 미루던 마사지 볼 하나를 샀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마사지를 해줘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아서 종종 나는 몸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친구가 알려준 게 제법 오래전인데 이제야 구매를 한 것이다. 친구에게 나는 마사지 볼을 샀다고 소식을 전했다. 친구는 이제 샀으니 좀 하라는 핀잔 섞인 걱정을 해왔다. 나는 당당하게 하려고 산 것이다 말했지만 돌아오는 친구의 대답은 그러면서 안 하겠지였다. 나는 단번에 대답했다. 할 거라고 그러니 산 거 아니겠냐고. 친구는 나에게 스스로를 믿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나는 나를 믿는다고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겠느냐고. 그 통화 이후 마사지 볼은 가끔 사용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일말의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다. 요즘의 나는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믿음이 있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일을 시작하고 수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뒤돌아보니 이제는 너무 애쓰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될 것들은 되는 것이니 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나의 작은 일말의 믿음은 마음 한구석에서 제법 큰 어떠한 안정감을 준다. 종종 뭐든지 잘 될 것이다 하는 생각의 이면에는 무한한 긍정에 대한 작은 불신도 있기 마련이다. 내가 가진 운과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질 때 그 무한한 긍정 또한 좋은 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성원은 자신이 잃어버린 반지가 후배의 손가락이 아닌 새끼발가락에 있다고 의심하던 순간이 확신이 될 때 윤영 또한 믿음이 깨졌음을 확신한다. 성원은 자신의 의심이 잘못된 것임을 그 반지라 생각한 것이 손가락에 들어가지 않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다. 의심하는 마음은 쉬이 수그러들지 않으며 오히려 더 커져만 간다. 의심의 씨앗을 부풀리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도 친구에 대한 의심이 커져버린 날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내 믿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의심은 끝도 없이 커진다. 그렇게 믿음은 소멸 직전까지 도달하고야 만다. 성원이 헤어진 윤영에게 했던 말처럼 바늘로 찔러 터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친구에 대한 믿음은 소멸 직전에 간신히 되돌아왔다. 성원이 윤영에게 말하는 그 장면을 친구에게 보내주었다. 막연한 의심은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지 성원의 입을 빌어 고백했다. 분명 나도 누군가의 믿음을 져버린 적이 있을 테지. 사라진 믿음을 되돌리는 건 어쩌면 불가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다시 믿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니까 말이다.
얼마 전 물건을 사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돌아 나오다 순간 멈췄다. 나는 점원에게 100달러 지폐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영수증을 보니 50달러에 대한 거스름돈이 적혀있었다. 나는 되돌아가 점원에게 물었다. 하지만 점원은 나에게 50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내 지갑에 나는 100달러 지폐가 두장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순간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더 따져 묻지 못하고 나와 골똘히 계속 생각했지만 나는 내 지갑에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하게 확신할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계속 생각했지만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점원이 나쁜 마음으로 그랬다면 분명 되돌려 받겠지 아니면 내가 착각을 했던가. 나도 나를 믿을 수없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믿고 싶은 구석만 믿고 있는 거 같았다. 근데 또 뭐 어떤가 그냥 딱 믿을 만큼만 믿어보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