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나에게 요즘 유명하다는 <나의 해방일지>를 보라고 몇 번 재촉을 해왔다. 그리고 자주 나에게 그 드라마를 예찬하곤 했다. 물론 늘 그랬듯이 나는 그 드라마를 아직 보지 않았다. 그 이후 친구는 종종 해방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했다. 해방은 탈출이라는 단어와 비슷해 보여도 그 단어가 주는 유연함이 있었다. 무언가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야만 할 거 같은 탈출이 아닌 스스로 빠져나오는 그런 행위 같달까. 그래서 난 종종 그 해방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아무튼 한국을 떠나 4년차에 접어든 게다가 30대 중반을 넘어선 여성으로서의 나는 작은 해방감들을 느끼며 살아내고 있다. 그 어디에도 지상 낙원은 없다는 말처럼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경험한 해방감들의 모음을 강요하듯 내보이고 싶지는 않다.
한국을 떠나기 전 지인들을 만났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 한번씩 만나 인사를 나눠야 했다.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 중 몇몇이 대구에 있어 그곳에도 들렀다. 저녁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전에 언니와 나는 밥을 먹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밀린 이야기들을 나눴다. 나의 선택을 지지해주던 언니의 말 몇마디에 울컥 했지만 밥상머리에서 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밥을 먹고 언니는 밖에서 담배를 태웠다. 난 차 안에 앉아 조수석 정면 창 넘어로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밥을 먹으면서 훨훨 날아가라했던 언니의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서른이 넘어 결정한 나의 외국행은 오래된 친구들에게는 다소 놀랍고 신선한 결정이었다. 한번도 집을 나와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서울을 벗어나 살아온 적이 없던 내가 외국으로 떠난다고 게다가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말이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았고 집에서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던 30대 여성의 이 무모한 결정은 어디서 시작된것일까?
20대의 나는 갈 길을 알 수 없어 늘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4년제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으며 초라한 education history 는 늘 나를 따라다니는 초라한 꼬리표 같았다. 어느 집이든 그렇겠지만 부모의 바람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길 바라는 바람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어느 날, 대형 서점에서 여행 서적들을 둘러보다가 한 20대 청년이 떠난 여행 에세이를 봤던 기억이 난다. 어떠한 호기심도 없었지만 늘 어딘가로 떠나볼수는 있을까 하는 막연함이 있었다. 그런 마음에 무심코 열어봤던 책의 시작은 부모님이 사주신 비행기 티켓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럼 그렇지. 부유하던 나의 20대는 사소한 것들에 자주 좌절되었으며 그것들을 뒤로하고 버티며 살아왔다. 딱히 좋은 학력도 경력도 없는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식은 너무나도 제한적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떠한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지난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평생을 떠나고자 마음을 먹을 수 없던 내가 서른을 넘기고서야 떠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발을 붙이고 살겠다는 의지는 생각보다 확고했다. 통장 잔고는 적고 빌린 돈으로 매꿔서 시작해야 하는게 조금 서글프고 걱정은 되었지만 그렇게 나는 한국을 떠났다.
이젠 어디든 구글 지도만 켜도 세계여행이 가능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내 손에는 그 무엇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모든곳이 미지의 세계였으며 당장 난 이곳에 가서 무엇부터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였다. 서른을 앞두고 우리는 종종 앞으로 뭐 해 먹고 살아야 할까 고민을 했었다. 여전히 그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여유가 없는 삶은 익숙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선택했던 것은 더 나은 옵션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새롭게 뭔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선 내가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번은 기대해볼만한 선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기대했다. 먼 미래에 대한 기대일지라도 말이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비행기 티켓까지 사고 난 뒤 나는 그제서야 부모님에게 곧 떠나겠다고 말을 꺼냈다. 떠나는 날짜가 정해지기까지 서류를 준비하는 기나긴 과정에서도 나는 집에 말하지 않았다. 서른이 넘은 딸이 다짜고짜 외국에 있는 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두 팔 벌려 반기겠는가. 영끌을 해서 투자를 하고 집을 사려고 제태크를 하는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딸에게 말이다. 혹여나 걱정과 우려의 말들을 할까 싶어 나는 모든걸 비밀리에 진행했다. 내 두손에 비자 서류가 쥐어졌고 나에게는 호주에서 3년을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 자격은 학생으로서의 신분이기도 했다. 학생으로 시작하는 이 기간을 보내는 것은 이미자로써의 삶을 선택하는 많은 이방인들의 루트라는걸 나는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면 그저 기술 하나 배워서 돌아오는 유학생 정도로 생각하셨다. 어쨋든 외국에 나가 학교를 다니겠다고 하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늦은 나이에 하는 도전처럼 여겨진 듯도 싶었다. 그저 집에 아쉬운 소리 없이 잘 지낼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 나에게는 갚아야 할 돈이 있는 채무자라는 명칭이 달렸으니 그 짐까지 가지고 떠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 이민용 캐리어 하나와 기내용 캐리어 그리고 백팩 하나에 모든 짐을 담았다. 생각보다 가져 갈 짐이 많이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 몇 년 지내다 돌아온 지인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만났을 때 나는 물었었다. 그 예쁜 방을 뒤로 하고 나온 기분이 어땠냐고. 그는 말했다. 당장 자신의 손에 들려진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5층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짜증이 더 컸다고 말이다. 애정이 깃든 공간에 대한 추억과 회상이 아닌 무거운 짐을 끌고 공항으로 가야 하는 현실. 이방인에게 여유와 정착은 가질 수 없는 무언가일까 생각했었다. 그래도 아마 한국으로 돌아와 그 방을 그리워 했을거라고 난 생각했다. 좋았던 것들은 언제고 불쑥 생각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떠나는 날은 아빠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출근길에 엄마가 싸준 김밥을 아침으로 먹고 한번도 내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내 방을 쓱 둘러봤다. 늦은 나이에 처음 내 방이 생겼을땐 좋았지만 결국 난 방을 꾸미지 않았다. 왜인지 언제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유예를 하면서 매번 사려던 가구를 결국 사지 않았다. 모아둔 책과 음반은 결국 방치 되어버릴 짐이 되었다. 집에 남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나왔다. 강아지를 한번 쓰다듬고 인사를 했다. 수시간이 지나면 난 다른 나라에 홀로 떨어져야 할 운명이었다. 며칠후면 돌아올 여행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을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