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는 팔에 두 가지 타투를 했었다. 두 번째로 했던 타투의 그림은 어떤 구멍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다. 사람들은 이 타투를 보고 귀엽다고도 했고 그다음으로 많이 물어왔던 건 무슨 뜻인지였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뜻도 없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의 타투를 보면서 무슨 의미인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어느 외국인의 일러스트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했던 거긴 하지만 그때 나의 마음이 반영된 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그 이후로 종종 Escape you’re country라고 대답했다. 나는 내 마음이 가장 잘 투영된 유머러스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되물어오곤 했다. 그렇게 되면 또 한국에서의 팍팍한 삶의 대해서 부족한 영어로 설명을 해준다. 사실 어느 정도 의미와 그림이 일치하는 게 원래 도안에는 Be brave라고 쓰여있다. 내가 왜 골랐는지도 알겠는 지점이다. 종종 사람들은 나의 선택에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하지만 난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가끔 결정한 일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다. 내가 원해서 가질 수 있는 시절을 보낸 사람이 아니서였을까 나는 스스로 얻을 수 있다면 고집을 부리고야 만다. 어쩌다 보니 난 지금 요리를 하고 게다가 외국에서 살고 있다. 내가 한 타투처럼 말이다.
전에 같은 방을 쓰던 친구와 산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요리에 관심이 없었더라도 단지 영주권을 위해서 공부하고 일을 할 수 있었겠냐고. 난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 친구들이 내 결정에 두 번째로 놀란 것이 아마도 요리를 하겠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난 내 친구들이 모두 잘 알듯이 음식을 좋아하기는 해도 만드는 건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떠나겠다 결정하기 이전에 이 결정의 시작이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에서 외식업계에서 일을 했다. 바리스타 일을 배워서 경력을 쌓고 매장에서 일을 했다. 나름대로 한 달 벌어 한 달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게 가능했던 것은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부모님과 생활하면 끼니나 월세, 공과금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적은 월급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돈 모으기는 힘들었다. 나이를 먹고 30대를 바라보면서 고민은 더 많아졌다. 내가 해왔던 일로 나는 뭘 더 할 수 있을까. 사실 난 바리스타로써 하는 일을 좋아했지만 한국에서는 누구나 배워서 하는 일, 전문적이지 않은 일로 치부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하고 커리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세상 어느 곳이든 그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나처럼 좋아하는 이 일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나의 일로 만들 것인가 이것은 좀 더 복잡한 문제였다. 그리고 일이 좋다한들 어디에 내세울 만큼의 실력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셈이었다. 종종 또래의 친구들과 모이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우리의 미래를 걱정했다. 서른이 넘으면 우리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다른 일을 해봐야 할까 고민했다. 당시 SNS로 팔로우하고 있던 레스토랑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연락을 했다. 아무런 경험과 지식은 없었지만 일단 연락해서 면접을 봤다. 사실 공고에 특별한 조건들이 있지 않아서 일단 지원을 해봤었다. 결과적으로 사장님은 나를 채용했지만 내가 일하고자 했던 주방이 아닌 홀이었다. 손님을 응대하는 일을 계속해왔던 나에게 일단 익숙한 일을 먼저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러고 나서 주방에서 일을 배워보는 건 어떠냐면서 말이다. 사실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쨌든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했다. 계절마다 어떤 과일과 채소가 나오는지 그걸로 뭘 만들 수 있는지를 보면서 너무 즐거웠다. 새로운 경험은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박스에 담겨오는 여러 가지 채소들과 들꽃이 좋았고 농부님이 건네주시는 허브를 키우고 얻은 꽃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큰 의미 없이 그냥 바꿔보자 했던 나의 일이 구체적인 어떤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재료들이 계절을 보내고 견디고 그렇게 우리의 손으로 왔다. 늦은 오후에 앉아서 손끝이 까맣게 바질을 손질하던 시간, 복숭아의 껍질을 까고 모아 그걸로 그라니따를 만들던 여름. 나는 처음으로 손에 잡히는 계절을 경험했다. 그 재료들이 모여서 접시에 담겼다. 계절과 음식 그리고 그 음식들로 채워질 누군가의 시간들. 처음이었다.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별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 내가 찾고자 했던 다른 선택지를 안겨주었다. 이후에 호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거 알아봐 보니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뭔가 시기적으로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저 단순하고 빠르게 결정한 일이었다. 내 타투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일로써의 요리를 고민해보진 않았던 거 같다. 다들 한 번씩은 그렇지 않던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직업의 단편을 믿고 싶은 마음 말이다. 현실은 잠시 부정한 채 앞으로 다가올 지난한 시간들에 대한 고미는 잠시 미뤄두고 나는 내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요리를 해보는 건 어떨까 물어봤었다. 다들 흔쾌히 해보라고 말해주었다. 아마도 그런 친구들과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던 거 같다. 그 누구도 나에게 나서서 이 일이 왜 힘든지 늘어놓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 그랬다 한들 난 듣지 않았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나는 내 고집으로 결정한 일에 쉽게 물러서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이후에 내가 경험한 주방일들은 자주 최악의 순간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했던 경험을 믿었다. 왜 이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그 순간을 말이다. 비록 그때의 시간들 안에서도 좋지 않았던 시간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언제고 다시 그때의 그 경험을 할 수 있는 재밌는 공간으로 갈 수 있다고도 믿으면서 말이다. 그 기억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매번 좌절하면서 결국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아이들을 케어하고 가르치는 일도 환자를 돌보는 일도 나에게는 할 수 없는 아니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나에겐 우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이어야 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나에게 있어서 일은 지속가능한 활동이어야 했다. 다른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한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끈은 목표였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들 덕분에 좌절의 순간들에 조금 덜 상처입고 덮어둘 수 있었다.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들과 나와는 다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디서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생활은 계속 되었다. 타투에 그려진 사람이 까만 구멍으로 들어갔다. 발을 떼고 들어간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 다시 빛을 찾아 나올 수 있을까. 얼마전에 나는 세번째 타투를 새겼다. 구멍으로 달려가던 사람이 그려진 옆에 아주 멋지고 귀여운 포즈의 소녀와 I AM GREAT 이라는 문장을 말이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활기차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 나도 결국 같구나. 의미를 담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