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면 공용거실은 조용했다. 모두가 일을 나간 시간 대부분은 집에 적막이 흘렀다. 3개의 층으로 된 집에 총 10명이 산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누가 쓰던것인지도 모르는 푹 꺼진 소파에 앉았다. 활짝 열어둔 발코니 너머로 햇살이 가득했다. 길에는 햇살만이 쨍쨍하다. 그저 조용하고 맑은 어느 오후였다. 지인들과 함께 온라인으로 글쓰기 모임을 했었는데 그 달의 주제를 가지고 무얼 쓸까 고민했다. 조용한 집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하니 겨울의 차가움을 느낀지 두해가 지나갔다는걸 알아챘다. 호주 브리즈번은 일년의 대부분이 날씨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겨울이라 부르는 시기도 있긴 하지만 한국의 겨울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일년의 반 이상을 햇살을 머금고 살다보면 약간의 한기에도 몸은 움츠러든다. 한국에서의 여름은 습하고 무더웠다. 겨울은 수도가 얼 정도로 지독한 추위가 오기도 했었다. 왜인지 한국에서의 겨울들이 조금 그리워졌다. 얼굴을 에이는 추위에 바람을 맞아가며 걸었던 광화문 앞 길, 퇴근하고 동료들과 위스키 한잔을 마시고 역까지 걸어가던 늦은 밤, 오후에 찬바람을 뒤로하고 걸었던 산책길. 잔뜩 움추린 어깨와 차가운 발걸음에 한껏 힘이 들어가던 발 끝의 느낌들이 생각났다. 계절의 기억과 순간들은 한국을 떠나와서야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는 지나간 겨울을 생각하면서 상상했다. 그 추운 계절에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날 순간을 말이다. 그렇게 쓴 글은 나에게 보내는 위로 같았다.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먹던 음식을 혹은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나 또한 환경만 바뀌었을뿐 아등바등하는 삶을 이어가다보니 그리움은 아주 조금씩 쌓여갔다. 먼지처럼 쌓이는 그리움은 걷어내기 쉽지는 않았다. 마음이 힘들때 가던 곳들이 없어졌고 공연을 보고 친구들과 함께 보내던 시간들 또한 뒤로 밀려나가고 있었다. 마음의 위로를 받던 모든 것들이 이젠 내 주변에 없었다. 생계를 위한 돈과 학비,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서 무조건 일을 해야했다. 일해서 번 돈은 손에 남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돈을 모을 여유가 없었다. 즉 여가를 위해 쓸 돈도 거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다 각오하고 오긴 했지만 역시 지치는건 어쩔 도리가 없었으며 그리운 마음은 막을 길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 친구를 만났었다. 내가 호주로 떠날 결정을 하기 전 친구는 먼저 워킹 홀리데이를 호주로 다녀왔었다. 마침 친동생도 한국으로 귀국을 했고 남은 달러를 친구를 통해 환전을 하기 위해 만났다. 그때 친구는 이런 말을 했었다.
언니. 가면 돈 많고 여유 많아서 온 애들이 진짜 많을거에요. 근데 그런 애들 부러워말고 따라가려고 하지마요.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잖아요.
친구의 말은 어느정도는 맞는 말 이었다. 호주에서의 생활은 20대 시절에 일만 하고 꿈을 찾으려고 아등바등하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한 시절의 고단함을 나는 또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위로 받을 곳이 없으니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학원과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초반 혹은 중반으로 나보다는 어린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나온 시절을 나와는 다르게 생기 가득하게 빛나는 시간을 보내는거 같았다. 어린 친구들의 생기 가득함은 낯설기도 했으며 부럽기도 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호주에서는 일을 해 본 경력도 없어 한동안은 일자리를 구하는게 가장 힘들었다. 늘 구인 광고를 찾고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해야만 했다. 주변만 바뀌었을 뿐 치열한 하루 하루가 이어졌다. 일을 구하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불안한 마음과 무거운 마음에 짓눌리곤 했다. 그런 날은 그냥 나가서 걸었다. 걷고 오면 조금은 나아졌다.
인스타그램은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내가 올린 게시물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억도 안나던 어느 하루의 순간을 발달된 기술이 소환해주었다. 몇 천장이 되어버린 게시물과 기억도 나지 않던 어느 시간들은 내 그리움을 달래주기 위한 데이터가 되어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기능을 그 이후로 나는 자주 열어보곤 했다. 거기에는 친구들과 함께 했었던 저녁 식사, 친구의 결혼식, 공연장의 환호 모든게 다 있었다. 어떤곳은 사라졌으며 어떤곳은 이사를 했다. 누군가는 나와의 시간을 기억하겠지만 누군가는 잊었을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그저 쌓아둔 기록들은 잊고 살던 과거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리워졌다.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고 싶었다. 쉬는 날 혼자서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 카페에 앉아 계절 음료를 마시고 싶었다. 이젠 한국에서의 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통 그리움으로 바뀌어갔다.
나는 예전에 종로 낙원상가 옥상에 있던 씨네마테크 영화관을 좋아했다. 오래된 영화관 한쪽에는 나이든 어르신들도 몇 몇 모여 있었다. 상영관 앞은 넓은 옥상 부지가 있었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 붉은 햇살이 가득한 옥상은 그 자체로도 너무 좋았다. 늦은 오후 즈음에 <환상의 빛> 을 보고 나왔을때 해질녘의 미지근한 햇살이 가득했던 옥상을 난 잊을 수 없었다. 그 영화관이 더 좋아졌다. 평일 시간의 영화관은 열명도 채 안되는 사람들뿐이었다. 큰 스크린과 수많은 좌석들은 비어있었고 오래된 영화를 틀어주던 기획전의 하루를 나는 꾸벅꾸벅 졸다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종로의 거리를 쭉 따라 걸어서 광화문까지 걸어가는 걸 좋아했다. 사는게 고달픈 날이 많아도 어떤 공간에서 거리에서 나는 그렇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차라리 사람에게 받는 위로가 더 컸다면 사람들을 찾아 다닐텐데 그래서 더 그리웠다. 늘 사람들이 북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곳들은 오히려 위로가 되지 않았다. 햇살을 가득 머금고 살아온 사람들을 보니 나는 나의 그리움이 이해가 되었다. 어떤 계절에도 내 마음속에는 온기가 적었다. 차가운 마음을 보듬을 그저 조용하게 마음에 드는 노래들이 나오는 공간들이 가장 큰 위로였음을 그때 알았다. 사실 언제까지고 이 그리움들을 마음에 머금고 살아야 할까 나는 종종 생각한다. 때론 멀어진 시간만큼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들이 늘어가는것 또한 슬플때도 있다. 친구들의 좋은 소식에 함께 할 수 없고 그 누군가의 부고에도 난 갈 수 없다. 이러나 저러나 더 마음이 쓰인다. 인스타그램에 수천장의 사진이 그리움만 불러오는 시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제는 제법 많은 그리움들이 한켠에 쌓였다. 이 그리움들이 마일리지라면 이미 한국을 몇 번이고 다녀왔을텐데. 그럴 수 없으니 나는 한동안 또 그리움들을 쌓아두며 살아야 할 것이다. 먼지 같은 그리움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