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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지 모를 당신에게

어제의 마음

by kirin

왜 그런 날 있지 않아요?

막연하게 좋았던 어떤 것들이 그리워지는 날 말이에요.


어제는 그냥 마음이 조금 질퍽해졌어요. 왜 그랬는지 다 말하자면 말이 너무 길어질 테니 그냥 그렇다고만 말할래요. 혼자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마음들은 참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해요. 그래서 참 어렵지만 그 마음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내가 쓰고 있어서 참 다행이기도 해요. 너무 많은 마음의 결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어제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인지 도통 집으로 갈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생각 없이 열차도 반대 방향으로 타고 기왕 그렇게 된 김에 안주와 술을 사러 가게에 들렀어요. 마트에서 계산을 하느라 빼둔 한쪽 이어폰을 떨어트려서 부랴부랴 계산대로 다시 돌아가서 주워왔어요. 근데 술을 사려고 들른 가게에서 또 한쪽을 빼두었는데 가게를 나서려는 찰나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가게를 또 한 바퀴 돌고 점원에게 물어보고 다시 가게를 나갔어요. 방금 계산하고 나오면서 받은 동전을 가게 앞에 있던 노숙자에게 줬는데 그 사람에게도 물어봤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동전과 같이 넣었을지도요. 그 사람은 없었다면서 사람들이 이어폰을 잘 잃어버린다고 했어요. 그러다 혹시나 하고 주머니를 봤더니 거기 있었어요. 질퍽해진 마음만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이어폰까지 잃어버렸으면 아마 괜히 더 속상해졌을 텐데 다행이에요.


술과 먹을 간단한 음식을 사면서 땅콩 크림이 들어있는 빵도 하나 샀어요. 슬퍼서 빵 샀어라는 그 말이 생각나네요. 물론 그다지 슬프진 않았어요. 슬픈 것과 질퍽이는 마음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마감을 앞둔 시간이라서 빵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어요. 사실 빵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빵이 남아있는 진열대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났어요. 할머니가 빵을 좋아하셨었거든요. 그래서 전 종종 할머니의 간식을 사러 빵가게에 들르곤 했어요. 팥이 들어있는 빵은 무조건 샀고 그다음은 크림이 들어있는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빵들을 사곤 했어요. 어제 빵을 보다 아주 잠깐 할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찔끔 나려고 하는 걸 얼른 참았어요. 저녁식사 때 마신 칵테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밖에서 우는 건 여러모로 곤란하니까요.


어제 유튜브를 보다가 이경실 님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봤어요. 10대 시절에 아버지의 병시중을 하는 게 싫어서 도망치듯 떠나 서울에서 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어요. 그래도 늘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요. 안 좋은 일이 있을 땐 생각나지 않는다고요.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고 하잖아요.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물리적 거리의 헤어짐도 더 이상 볼 수 없음의 헤어짐 모두. 전 할머니와 제가 가진 공통의 아픈 기억이 늘 제일 슬펐어요. 어쩌면 할머니에게는 지독히도 힘들었던 지난 시간의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한 번도 서로 이야기를 꺼낸 적 없지만 기억하고 있는 아픔 때문에 그리고 날 키워준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에 한국을 떠나서 죄책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에요.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뒤바꿔 놓기도 하고 잔인하리만큼 매정하기도 해요. 그렇게 지나가면서 쌓인 시간은 가끔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해요. 그냥 묻히는 것뿐이지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흐를 거고요. 그래서 어쩌면 잊고 있었을 좋았던 기억도 다시 떠올려 보려고 해요. 분명 좋았던 것들이 있었을 텐데 많이 가려진 걸까요 아니면 정말 슬프게도 그 기억이 적은 걸까요. 아직도 오래 기억하는 건 집에 놀러온 친구가 할머니가 만들어준 김치전이 맛있다고 했던 일이에요. 이상하게도 그 일은 한 번도 잊히질 않아요.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 저희 가족들의 유일한 여행은 외갓집에 가는 거였어요. 아빠의 봉고차를 타고 긴긴 시간을 달려가던 길이었어요. 차 안에서 먹을 간식들을 사서 갔던 기억이 나요. 그때 한 줄짜리 땅콩 크림이 들어있던 긴 빵을 자주 먹었던 거 같아요. 한 번인지 아닌지 사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요. 근데 그때 그 빵이 너무 맛있었는지 시골 가던 길의 그 기억에는 늘 그 빵이 남아있어요. 먹고살기 퍽퍽하고 많은 일들이 휘몰아치던 우리 집에서 가족들은 여유 있게 여행을 간다던지 두런두런 모여서 뭔가를 한다던지 그런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전 가족들과의 맞닿아 있는 추억이 잘 없는 거 같아요.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느끼겠죠. 얼마 전에 엄마랑 전화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 엄마 아빠 모두 손기술이 좋은 사람들이라 제가 일을 잘하게 된 거 같다고 얘기하니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너 어릴 때 더덕 손질하는 거 보고 알았어. 한 번도 더덕 손질을 안 해봤는데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해보라고 하나 줬거든? 근데 야무지게 잘하더라고. 그래서 난 네가 손이 야무진 걸 알았어.


처음이었어요.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걸 엄마가 이야기해 주는 우리가 맞닿아 있던 어떤 순간에 대해서 말이에요. 기분이 참 좋았어요. 왜 엄마는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해준 걸까 싶었어요. 엄마는 더 많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의 어릴 적 기억에는 늘 엄마는 해가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래서 종일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던 기억이 더 많으니까요.


오늘은 종일 비가 오네요. 날씨도 쌀쌀해져서 조금 남은 커피가 금방 차갑게 식어버렸어요. 어제의 질퍽이던 그 마음 때문인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괜히 그 마음에 갇혀서 천천히 발을 구르는 하루가 될까 봐 밖으로 나섰는데 그러길 잘한 거 같아요. 동네 작은 카페에서 마신 커피도 참 맛있었고요. 어제의 저녁 식사는 정말로 별로였거든요. 낮은 평점을 남기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는 게 갑자기 싫어졌어요. 그 식당에서만 보는 리뷰면 전 더 솔직하게 쓸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이런 건 무슨 마음일까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낙엽이 잔뜩 쌓여있어서 좋았어요. 이젠 비가 더 자주 오겠지만 또 금방 해가 지나고 봄이 오겠죠. 시간은 늘 그렇게 가버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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