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공항에 도착한 첫 날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출발하는 밤 비행기를 타고 장장 11시간 정도날아가 도착한 시드니. 거리는 멀지만, 남반구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시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서머타임 여부에 따라 1시간 혹은 2시간의 시차가 존재함) 설렘과 긴장감으로 뒤섞인 복잡한 마음 때문에 비행기에서 잠은 설쳤고 이민가방 가득 찬 짐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오니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햇살과 상쾌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미리 나를 마중 나와있던 유학원 직원의 차를 타고 유학원에서 간단한 서류 작업을 마친 후, 한 달간 홈스테이 할 집으로 향했다. 워낙 급박하게 유학을 결정했기 때문에 유학원을 통해 일을 진행했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으니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호주 유학을 준비한 내용에 관해서는 '미국이 아니라, 호주 대학원을 가겠다고?'를 참고하시길.)
내가 한 달간 머문 홈스테이 장소는 Randwick에 위치해 있었다. 해마다 큰 경마 축제가 열리기도 하는 장소지만 평소에는 조용하고 깔끔한 분위기의 동네다. 아름다운 Coogee 비치가 비교적 가까웠고 내가 다닐 UNSW와도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여유로운 이 동네 분위기가 좋아서 시티로 이사 간 후에도 종종 굳이(?) 이곳에 영화를 보러 오기도 하고 이곳 타이 레스토랑의 파타이와 포르투갈식 치킨을 먹으러 들리기도 했다. 이민자의 나라인 호주답게 온갖 종류의 맛있는 현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드니. 호주에서 미식에 새로이 눈을 떴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특히 코코아 향 가득한 락사의 강렬한 첫맛을 잊을 수 없다. (호주 음식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풀어보겠다.)
홈스테이 집주인은 말레이시아계 싱가포르인 할머니였는데 까탈스럽고 깔끔한 편이었다. 며칠 동안 나와 홈스테이 기간이 겹친 다른 한국인 어학연수생은 할머니와 잘 안 맞아 계약기간보다 더 일찍 나가기도 했다. 뭐, 깔끔하기로는 나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 할머니를 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 외로우셔서 그런지 틈만 나면 대화를 시도해서 그게 좀 피곤하긴 했다.
Randwick에 있던 타이 레스토랑, 파타이가 일품이었다
대학원 입학까지는 2달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적응도 하고 대학원 부설 어학원에 다니며 학업 준비도 할 겸 조금 일찍 호주로 왔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얼른 호주로 떠나고 싶었다.
첫날 시드니 시티에 가서, 미리 계획한 대로 휴대폰을 개통하고 은행계좌도 만들고 나니 그제야 몸에서 피곤하단 신호를 보낸다. 그렇지만 아침 일찍 도착한 시드니는 이제 겨우 점심시간. 뭐가 급하다고 첫날 그리 무리하게 돌아다녔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지만, 그땐 철없고 체력은 좋고 어리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덩그러니 떨어진 느낌이 주는 묘한 해방감과 기분 좋은 낯섦. 그걸 만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드니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진을 한 번쯤은 봤을 '오페라 하우스'를 목표로 무작정 시티를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았다. 버스라도 탈까 했지만(탔어야 했다) 날씨도 좋고 내 체력도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명물, 그토록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오페라하우스가 눈앞에 있었다. 찬란한 햇살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감동의 눈물일 거다. 햇살 때문에 급히 챙겨 온 선글라스가 고맙기까지 하다. (호주의 햇살은 정말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가 패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하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멍하니 한참을 바라봤다. 세계적인 미항답게 어디를 둘러봐도 아름다운 광경. 바다와 절묘히 어우러진 하늘, 노천카페, 사람들, 그리고 그날의 향기. 지금도 생생히 뇌리에 박혀있는 느낌이다. 그 느낌 그대로 맥도널드 맥카페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사서 걸었다. 호주의 로컬 카페가 얼마나 훌륭한데 맥도널드 커피라니! 맥카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드니 1일 차의 유학생에게는 로컬카페를 알아볼 여유도 정보도 없었다. 참, 한국에서 맥도널드 맥커피 무척 즐겨 마시니 오해 마시길. (호주의 독특한 커피 문화와 로컬카페에 관한 글은 '호주에서 스타벅스 찾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를 참고)
홈스테이 집까지는 버스로 가면 20분 정도 되는 거리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은 느낌. 마침 버스정류장에 다가오는 Coogee 비치행 버스에 일단 올라탄다. 호주의 4월, 가을 햇살은 여전히 빛나고 종점에 내려 감탄사 연발.
와 바다다. 그것도 너무나 멋진.
아는 사람도, 같이 공유할 사람도 없지만 그 순간이 행복했다. 지금처럼 영상통화가 자유로운 시대도 아니었고 mp3에 담아온 노래를 랜덤 재생하며 나 혼자만의 해변 타임을 즐겼다. 역시나 해변가 맥도널드 아이스크림 콘 하나와 함께.
아름답던 Coogee Beach (출처: www.sydney.com)
장시간 비행에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느끼는 긴장감 그리고 무모한 일정에 따른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하루 일정을 그렇게 잡았을까.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호주 도착 첫날부터 느껴진 다른 문화, 다른 분위기, 그리고 이 다르고 낯섦이 가져다주는 불안함과 설렘 속에 하루를 마감했던 기억이 난다. 무모할 정도로 급하게 유학을 결정하고 퇴사를 하고 준비하여 호주에 와버린 나. 그때의 심정은 '막막하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겨우 첫날인걸. 내 인생의 다시없을 건강하고 젊은 시절의 해외생활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