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쓰다
카니자 삼각형. 이탈리아의 심리학자인 카니자 교수가 개발한 것으로, 집게발처럼 생긴 세 개의 팩맨(pacman)의 배치를 통해 흰 삼각형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찾아낸 것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카니자 삼각형이었다. 세 개의 팩맨은 각각 언론, 지식인, 국민.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삼각형은 진정한 민주주의다.
'프레이밍(Framing)'과 '프라이밍(Priming)'이라는 저널리즘 이론이 있다. 한국말로는 '의제설정'과 '점화효과'로 번역되어 쓰인다. 대통령 선거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두 후보자가 있다. 한 명은 법학을 전공했으며 뛰어난 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고, 한 명은 기업인 출신으로서 경제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이 금융위기를 비롯한 경제 상황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면,
> 뉴스 수용자는 '경제'를 주요 이슈로 인식하고, (프레이밍)
> 대통령 후보를 평가할 때 '경제'에 관한 요소들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프라이밍)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론이 의도적으로 대중의 관심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무엇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사회 내에서 이슈가 되는 사건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SNS 등이 보편화되면서 대중이 정보를 얻는 소스가 다양해졌지만, 불과 2,30년 전만 해도 내가 사는 곳 바깥의 소식을 알려면 TV와 신문, 그리고 전화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회를 억압하려 시도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언론을 통제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바깥의 사람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언론의 자유가 중요한 이유다.
촘스키에 의하면,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시기에는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과 홍보 기관이 총동원되었다. 가치를 망각하게 하고, 순종하도록 만들고, 연대를 차단함으로써 대중을 우매한 구경꾼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회 내에서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그 사회의 언론 자유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언론이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언론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대중 속에서, 혹은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사회의 흐름을 읽고, 이해하고, 고민하고, 옳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 촘스키가 말하는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지식인'을 어떤 사람이라 정의하십니까?
마음가짐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훌륭한 지식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거꾸로 이런 이상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대학교수들과 저술가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32p)
지식인의 영어 단어는 '지능의, 지적인' 이라는 뜻을 가진 'intellectual'이고, 질문을 올리고 답해주는 네이버의 지식 교류 서비스 이름은 '지식iN'이다. 이렇게만 보면 지식인은 교육 수준이 높고 방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드는 자"라고 정의했듯, 지식인은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언론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때, 반대편에서 언론이 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잘못된 말을 비판하는 감시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세월호 유족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는 작가들이 하나의 예가 아닐까.
자유로운 언론과 행동하는 지식인이 있다면, 대중은 이들을 발판 삼아 연대해야 한다. 여기서 연대란 케케묵은 민족주의나 가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유석 판사의 말을 빌자면,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저서 <개인주의자 사회>에서,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라고 썼다. 촘스키가 말하는 '국민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기 위한 조건과 동일한 맥락이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해결하기 위한 조직화. 진정한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닫아야 합니다. 주변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는 어떻냐고요? 괜찮습니다. 특권층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런 특권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는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합니다.
이런 곤경에 처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조직화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희생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선전이 아니라 이런 파괴 공작이야말로 국민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는 것일 수 있습니다. (171p)
한 사람이 건널목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가리킨다. 또 한 사람이 나타나 옆에 서서 하늘을 가리킨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나타나 하늘을 가리킨다. 그러자 무관심하게 지나가던 행인들이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회학자 밀그램의 '하늘 올려다보기 실험'이다. 특정 행동을 하는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옳은 행동이라면 더욱더 많은 사람이 행하도록 해야한다. 연대가 중요한 이유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 열기와 메갈리아4 텀블벅 후원의 대성공 등은 개개인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힘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카니자 삼각형이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고, 허울뿐인 지식인은 차고 넘치며, 개인주의보다는 이기주의인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렇지 않은 언론인, 지식인, 대중들이 더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카니자 삼각형을 만들기 위해 나 역시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