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4천원 인생>을 읽고 쓰다
1. 4천원 인생
2009년 법정 최저임금은 4000원이었다. [4천원 인생: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이 책은 2009년,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의 기자 네 명이 감자탕집과 갈빗집에서, 대형마트에서, 마석가구공단에서, 안산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가 되었던 한 달간의 체험기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고작 4000원이라고 한다. 인생을 팔아도 커피 한 잔 살 수가 없는 거다. 여기서 4000원은 그 한 사람의 시급이다. 3개월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8시간을 내리 서서 일해도, 언제 잡혀갈지 몰라 불안에 떨며 일해도, 하루 일이 끝나면 손이 굳어 펴지지 않을 만큼 일해도, 1시간에 겨우 4000원밖에 손에 쥐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좋은 제목은 없을 듯하다. 책 속의 노동자들은 저자들이 취재를 위해 특별히 택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절절한 사연이 있는지, 특별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지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는 식당 아줌마, 마트 직원, 이주 노동자, 그리고 비정규직 근로자였다. 그래서 이 책은 나와 너와 우리의 이야기다.
2. 마음속에 새겨지는 저널리즘
나는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지만, '저널리즘'을 무어라 정의하는 일은 늘 어렵다. 다만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웠던 기자의 의무 중 하나가 기억이 난다. '기자들은 그들이 취재하는 대상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이 원칙에 입각해서 보자면 이 책은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기준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을 유지하기는 커녕 취재 대상들과 완전히 섞여서 한 달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이러한 원칙의 목적인 '객관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취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취재 대상에게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되며 취재의 결과물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배워왔고, 그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전달해주는 게 저널리즘의 역할이라면, 그 역할을 온전히 다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스트들이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옳다고 말이다. 하지만 네 명의 기자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그들의 처지에 공감했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꼈고, 자신들이 그 일에 절박해지지 않을 수 있는 '기자'임에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통계 수치와 함께 제시하는 객관적인 기사보다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며 알게 된 그들의 생활과 희로애락을 그려내는 '체험기'에 가깝다.
나는 이러한 형식을 취하는 저널리즘이 좋다. 이 글의 제목인 '마음속에 새겨지는 저널리즘'이 그 이유다.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뉴스 기사들은 드물다. 정확한 사실, 때로는 각종 수치들이 동반되는 객관적 글쓰기는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물론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뉴스 기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에 객관적 글쓰기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글들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정도일 뿐이다. [4천원 인생]의 글들은 다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정말로 '마음속에 새겨'진다. 이야기에 등장한 노동자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했던 생각과 느꼈던 감정들이 오래 남아있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한다. 읽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되었든, 슬픔이 되었든 무언가가 새겨진다면, 그 마음을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노력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변화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변화를 위한 초석을 세우는 것. 내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의 목적이다.
3.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노동 일기
내 생애 첫 아르바이트는 중학교 시절, 추운 겨울이었다. 옆 동네 아파트들에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아파트 현관이 열렸다. 그곳에 사는 누군가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추운 겨울이어서 아파트의 철저한 보안 시스템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아파트 열두 동을 돌고 5만 원을 받았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수능이 끝난 후의 겨울이었다. 매일 아침, 중학생 때 전단지를 돌리던 동네의 PC방으로 향했다. 눈이 잔뜩 오는 추운 날씨에는 가기 싫은 다리를 억지로 끌어야 했다. 하는 일은 별 게 없었다. 새벽 아르바이트생이 적어 놓은 장부가 맞는지 확인하고, 좌석들이 깨끗한지 돌아보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렇게 6시간 동안 일을 했다. 대체적으로 편한 아르바이트였지만, 팁이라고 50원을 주던 아저씨와 머리를 감아도 없어지지 않는 담배 냄새는 조금 힘들었다. 그렇게 일해서 번 돈은 1시간에 3000원이었다. 최저시급이 얼만지는 몰랐지만 조금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겨우 열아홉 살이었던 당시의 나는 얌전히 3000원을 받았다. 집에 가는 길에 택시를 타면 내 1시간 노동의 값이 날아갔다.
이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나의 경험은 이것이 거의 전부였다. 참 쉽게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받았던 시급은 [4천원 인생]의 노동자들보다 적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과 비교했을 때 나의 것을 노동이라고 하기 민망해지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절박함'이다. 나는 PC방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장님이 나에게 불합리할 정도로 일을 시킨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만둘 수 있었다. 부모님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책 속의 노동자들은 절박하다. 벼랑 끝에 서있다. 무슨 수모를 당해도 쉽게 일을 그만둘 수 없다. 그들을 보호해주는 아무런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가족을 감싸는 울타리이기 때문에. 4000원의 시급을 포기하는 순간 위협받는 생계가 그들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노동 일기라고 생각한다.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노동'이라고 본다. 헤겔은 '인간의 노동이 정신 또는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에 의거하면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행복이나 보람과 같은 정신적 가치를 얻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4천원 인생]의 노동자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노동은 그들의 정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을 부여하는 고용주들 중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을 자신과 같은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노동'자'들을 위해 제정된 법을 지키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기계의 대체품 또는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렸다. 최저임금의 상승이 그들에게 노동의 가치 상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느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그래서 왜 대안은 제시해주지 않느냐. 대안은 도대체 뭐냐.'라고 말하는 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은 답답하고 먹먹한 감정에서 나온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네 명의 기자들이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성과는 바로 이러한, 대안을 원하는 독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동안 우리는 책 속의 노동자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음식점에 가면 당연히 있는 식탁과 의자처럼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했고, 기사 속 통계 수치들로, 뉴스 속 정책의 대상들로 내 주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이제 나를 포함해 [4천원 인생]을 읽은 사람들은 그 속의 노동자들이 나와 같은 체온을 지닌 한 명 한 명의 인격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구체적 대안의 제시 없이 오직 노동자들의 일상과 감정, 그리고 경험만을 생생히 전달하려 애쓴 이 책의 성과는 바로 거기에 있다.
[4천원 인생]에 나오는 노동자들의 가족은 그들이 '4천원 인생'을 살고 있음을 모를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것은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그들 자신 뿐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가족조차도 전부 알지 못하는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드러내 준 네 명의 기자들이 고마웠다. 임지선 기자는 이렇게 썼다. "'감자탕 노동일기'를 쓴 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럼 되받아친다. 당신조차 어렴풋이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 변화라고." 많은 사람들이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어 준 네 명의 기자들과 이 책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