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를 보고 쓰다 (1)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는 다양한 결을 지닌 영화다. 애절한 사랑을 담은 로맨스, 불시에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코미디, 어찌 보면 서로가 속고 속이는 케이퍼 무비.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열일곱 숙희의 성장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1. 선택
숙희(김태리 분)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숙희의 엄마는 숙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엄마가 죽고 장물아비의 손에서 자란 숙희는 자연스레 엄마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그런 숙희에게는 대도였던 엄마의 명성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있다.
'나면서부터 이곳 보영당에서 복순 씨라는 은포 최고의 장물아비, 아니 장물어미 손에 자라 일찍이 다섯 살 적에 진짜 돈 가짜 돈을 구별할 줄 알았고, 이 구가이에게서는 가짜 도장 파는 법을, 끝단이에게서는 소매치기 기술을 두루 익힌 몸이지만, 이 애기들은 그런 쓸모 있는 재주는 못 배울 팔자다.'
돈의 진위 구별, 가짜 도장, 소매치기 같은 기술들을 '쓸모 있는 재주'라고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숙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한 밑천 잡아서 조선땅 뜬다'는 야심을 이루기 위한 물욕도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엔 숙희의 주체적인 선택이 없다. 나면서부터 도둑으로 키워졌고, 어릴 적부터 돈을 만지면서 물욕은 자연스레 몸에 배었다. 어쩌면 숙희는 대도의 딸이라는 수식어로 인해 자신의 삶에서 다른 선택지를 갖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히데코를 만나기 전까지 숙희는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본 경험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2. 모성애
'끝단이는 제 새끼 말고는 절대 젖을 안 준다. 나같으면 안 그래. 나도 젖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애기들을 다 먹여줄텐데...'
숙희의 성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강한 모성애다. 이는 숙희의 대사와 행동으로 계속해서 표현되는 부분이다. 보영당의 아기들 모두에게 젖을 먹여주고 싶다는 말이나, 저택으로 떠나기 전 아기들에게 뽀뽀를 해주고 자신을 질투하는 끝단이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모습. 그런데 숙희의 모성애는 주체적인 선택 경험의 부재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끝단이가 '제 새끼 말고는 절대 젖을 안' 주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숙희는 사랑을 온전히 쏟을 만한 대상을 선택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강한 모성애가 보영당의 모든 아기들에게 향했던 것이다.
이후 저택에 들어가 히데코를 만난 후부터 숙희의 모성애는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게 향한다. 악몽을 꾼 히데코 옆에 누워 토닥거리며 자장가를 불러주고, "아가씨는 제 애기씨세요"라며 목욕을 시켜주고, 뾰족한 이를 손수 갈아준다. 물론 숙희에게 히데코는 백작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가까워져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하녀의 임무를 넘어설 필요는 없었는데도, 숙희의 강한 모성애는 이를 넘어서서 히데코에게 다가가게 만든다.
3. 감정
사실 히데코를 속여 '한 밑천 잡아서 조선땅 뜨려는' 숙희의 야심찬 계획은 히데코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처음 히데코의 얼굴을 마주보고 놀란 숙희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차고, 그 위로 흘러나오는 숙희의 나레이션.
'염병... 이쁘면 이쁘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사람 당황스럽게스리.'
별다른 부연설명도 필요 없고, 숙희는 그냥 태어나 처음 보는 이쁜 아가씨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다. 숙희 역의 배우 김태리는 인터뷰에서 '시간이 지나서 그게 사랑이었나보다 하는 거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숙희는 자신의 감정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기에 여러 감정들이 층층이 더해지며 결국엔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다섯 살 때부터 낯선 땅의 저택에서 외롭게 자란 아가씨에 대한 연민, 아가씨에게 다가가는 백작에 대한 미움, 가까워지는 아가씨와 백작의 모습을 보며 생겨나는 질투. 어쩌면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모든 감정들로 숙희는 혼란스러워 한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질투에 불타올라 히데코를 위해 따온 버섯을 내팽개치고, 쿵쾅거리며 계단을 오르고, 닫힌 방문을 노려보며 '히데코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4. 선택, 그리고 성장
히데코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숙희를 히데코가 부르고, 둘은 백작과의 첫날밤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아마도 이날 밤을 기점으로, 숙희는 히데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백작과의 계약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나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 무슨 뜻인지 알지?"
- "다른 데 할 일은 없어요. 아가씨 보살피는 게 제 일인 걸요."
섹스씬 다음날의 초상화씬에서, 백작은 숙희에게 돈을 주며 나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히데코와 둘만 있도록 만들어달라는 요구다. 여기서 숙희는 아가씨를 보살피는 게 자신의 일이라며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는데, 이는 처음으로 숙희가 주체적인 선택을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어미로부터 물욕을 물려받았고 그 물욕으로 인해 저택에 들어오게 된 숙희가, 자신의 감정을 따라 돈이 아닌 아가씨를 택한 것이다. 그런 숙희의 모습을 본 백작은 숙희를 불러 계획대로 행동하도록 몰아붙인다.
"숙희야, 보영당 식구들을 생각해. 허리도 성치 않은데 아기들 시중 들며 늙어가는 복순씨하며 그 팔푼이들. 빈손으로 가면 얼마나 실망들 하겠어? 엄마의 전설에 먹칠할 셈이야? 금의환향해야지."
이 말을 들은 숙희는 다시금 혼란스러워졌을 것이다. 히데코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히데코와 달리 숙희는 자신이 그녀를 속이는 줄로만 알고 있기에, 자신이 실은 도둑에 사기꾼이라는 진실을 밝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조차도 확실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제껏 자신을 키워준 복순씨와 보영당 식구들도 눈에 밟힌다. 그래서 눈물 고인 눈으로 '내가 그 분이 아니라 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라고 돌려서 사랑을 고백해오는 히데코에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대답한다. '사랑하게 되실거에요.'
하지만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버리려 드는 히데코의 모습에, 숙희는 다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히데코를 선택하게 된다. 이후 숙희는 흔들리는 히데코를 잡아주는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히데코를 가뒀던 서재를 부수고, 뱀의 머리를 내리친다. 낮은 담도 넘어서지 못하는 히데코를 위해 가방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자신이 내민 손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료칸에서 점점 미쳐가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빨리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를 자처한다. 숙희의 이 모든 행동들이 히데코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당신의 구원자예요.
* 제목은 박찬욱 감독의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