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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니 Mar 06. 2017

창작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태도

영화 <23 아이덴티티>를 보고 쓰다

<23 아이덴티티> (원제: Split)는 <식스 센스>, <더 비지트> 등을 연출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이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로, 소재도 흥미롭고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제임스 맥어보이가 이 영화에서 인생연기를 선보였다 해서 개봉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었다. 포스터에 쓰인 카피는 '24번째 인격, 절대 그를 불러내지 마라'. 오, 카피도 아주 흥미진진하다. 23개도 아니고 하나가 더 있다니. 그리고 드디어 관람. 소감은 어떻냐면, 이렇게 불쾌한 영화도 오랜만에 봤다는 거. 


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영화는 낯선 곳에서 깨어난 소녀를 비추며 시작된다. 이 소녀를 납치한 주인공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다중인격장애라고도 하는 해리성 정체 장애를 앓고 있는 남자로, 언제 누가 등장할지 모르는 23개의 인격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케빈은 이제껏 나타난 적 없는 24번째 인격의 지시를 받고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를 포함한 3명의 소녀를 납치한다. 이 납치는 23개 인격 중 셋인 데니스, 패트리샤, 헤드윅이 24번째 인격의 지시 아래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의 시작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24번째 인격인 '비스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세 인격이 준비해온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이 영화에는 정신질환, 납치/폭력, 성폭력을 포함한 아동 학대 등 민감한 소재들이 얽혀있다. 하지만 샤말란 감독이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은 무감각하고 안일하기 짝이 없다. 먼저 주인공 케빈이 앓고 있는 질환인 해리성 정체 장애를 보자. 이는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disorders)의 종류 중 하나로, 개인의 심리적 갈등이나 외부적 충격에 대한 '자기방어기제'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케빈의 경우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가 병증의 원인이며, 학대받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기제'로서 분열된 23개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케빈의 질환 자체는 아동 성폭력과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 등이 결합된 심각한 사안인데, <23 아이덴티티>에서 이 질환은 영화의 재미를 위해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수준으로밖에 다뤄지지 않는다. 24번째 인격인 '비스트'가 되었을 때는 스태미나 약을 맞은 울버린처럼 달리기를 하고, 총에 맞아도 총알이 몸을 뚫지 못하는 진짜 '짐승'이 된다. 해리성 정체 장애로 인한 변화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어이가 없다. 상업 영화에서 정신질환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대중에게 해당 질환과 이를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주기 딱 좋은 행동이다.


23 아이덴티티 (Split, 2016)


또 다른 문제는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다. 납치된 케이시는 어린 시절 삼촌의 성폭력을 경험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 삼촌의 슬하에서 자라난 아동 성폭력의 피해자다.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인 케이시를 또 다른 폭력적 상황에 던져놓고 이를 포르노적으로 그려낸다. 모로 누워있는 케이시를 정수리 쪽부터 시작해서 가슴이 부각되도록 촬영한 숏을 보면서는 감독이 아동 성폭력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강자인 비스트가 공격하는 사람들은 나이 든 여성인 플레처 박사와 어린 소녀 세 명이 전부로, 힘이 약한 여성들만이 폭력의 대상이 된다. 고통받은 자는 순결하니 뭐니 떠들지만 결국 약자를 제물 삼아 힘을 과시하는 것일 뿐이며, 약자들은 도구적으로 소모된다. 비스트의 계획에 이용되는 세 인격 역시 학대받은 인격인 데니스, 어린아이 인격인 헤드윅, 여성의 인격인 패트리샤로 모두 사회적 약자인 인격들이다. 약자가 강자를 불러내 또 다른 약자들이 공격당하는 꼴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구출된 케이시에게 경찰이 다가와 삼촌이 데리러 오셨다고 말한다. 경찰을 바라보는 케이시의 눈에는 아무런 생기도, 희망도 없다. 끝내 케이시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케이시는 폭력에서 폭력으로, 그리고 다시 폭력으로 내던져지며 영화는 끝난다. 


<23 아이덴티티>는 결코 지루한 영화가 아니다. 자극적인 소재들을 아무 의식 없이 자극적으로 그려냈으니 지루할 수가 없는 영화다. 샤말란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아니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는 것이니 하지 마세요, 뭐 이런 교훈 전달? 설령 그런 것이라도 어처구니가 없고, 단지 재미를 위한 연출이라면 그건 더더욱 문제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같은 착한 얘기만 만들라는 소리가 아니다. 자신이 다루는 이슈에 대해 취해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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