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겨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여름에는 시원한 나라,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는 것은 모든 이들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소시민을 자처하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로망 하나쯤은 지키고 살자 싶어서 지난 겨울, 3박 4일로 보라카이에 다녀왔다. 우리 일행이 다녀간지 얼마되지 않아 보라카이는 환경 보호를 위해 6개월간 폐쇄 조치가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알차게 느껴지는 여행이었다. (후후.)
올 10월이면 섬 폐쇄 조치도 해제된다니 겨울 여행지로 리스트 업 하시라고 늦은 여행기를 올린다. 참, 그런데 보라카이는 건기 우기가 있어 2,3,4월이 가장 관광하기 좋다고 하니 그것도 참고하면 좋겠다.
2018년 2월 15일 저녁 10시, 필리핀 칼리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습한 기운이 훅 느껴져서, 한국에서 겨울 외투를 차 안에 벗어놓고 온 나를 무척 칭찬해주고 싶었다.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출국 수속을 밟았지만, 필리핀의 첫 공기를 맛본 순간 전부 보상되는 것 같았다.
보라카이로 가는 관광객의 절반은 중국인, 나머지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정말그랬다. 중국어와 한국어가 섞인 입국 수속 시간, 천장에서는 뿌연 먼지가 앉은 선풍기가 윙윙 돌아갔다. 공항 내에는 필리핀 공항 경찰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군데 군데 서 있었다. 필리핀 공권력이 상당히 무섭고 엄하기로 유명하다고 들어서 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여권 안에 끼워 넣어뒀던, 입국에 반드시 필요한 종이가 사라졌던 것이다. 수속 절차를 진행해준 사람이 모르고 그걸 자기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았다. 문 앞에 있던 사람은 종이를 내지 않으면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고, 나는 덜덜 떨며 퇴근 준비를 하는 입국 수속 직원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내 종이를 쓰레기통에 모르고 넣은 듯 하다. 찾아달라.’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아 짧은 영어와 함께 절박하게 몸짓을 했다. 그는 몇 번이나 귀찮다는 듯이 ‘없다’고 하는 듯 했으나, ‘내가 찾아보겠다’며 애원하는 몸집 작은 여자가 안쓰러웠던지 마지못해 몸을 비켜줬다. 손이 떨리니 찾는 손길이 더디게 움직였다. 웬 외국인이 자기 쓰레기통을 오래 뒤적뒤적 거리고 있는 게 불편해진 그는 ‘헤이, 헤이!’ 하면서 곧 감옥에 잡아넣을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강한 자극이 되었는지 순간 집중력이 올랐다. 그가 부른 공항 보완관들에게 거의 끌려가기 일보 직전의 순간, 나는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팍! 들어올렸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그는 머슥한 듯이 어깨만 으쓱거렸고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주며 (거봐, 임마) 그 종이를 입구에 내고,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휴.
보라카이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기 때문에, 칼리보 공항에서도 차를 타고 항구까지 가야만 한다. 그래서 관광객을 공항에서 항구까지, 항구에서 공항까지 실어주는 회사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러나 밤이 너무 늦었고, 중국인 관광객이 많아 저녁에 항구까지 이동이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칼리보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기로 했다. 공항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환전소에서 달러를 페소로 바꾼 뒤, 공항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한 오토바이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 오토바이는 옆에 짐도 싣고, 사람도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한 트라이시클이었다.
우리는 예약한 호텔 이름을 알려주며, 가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순간 눈빛이 흔들리며 얼마-라고 가격을 불렀다. 당시 현지 물가는 잘 몰랐지만 딱 들어도 그의 양심에 어긋날 정도로 세게 부른 것 같았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니 흥정할 것도 고려해서 부른 가격이었을텐데, 가격을 말하고는 이내 땅만 보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양심의 가책을 애써 숨기고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신, 혼자 엄청 싸우고 있군요.
흥정하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우리는 돈을 쓰려고 온 사람들이니까 좀 더 내도 되지-싶은 생각이 들어 바로 오케이를 했다. 그는 놀람과 기쁨, 그리고 미안함이 동시에 보이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는 우리 짐을 일일이 자기 오토바이에 실어주고, 호텔에 도착해서도 함께 짐을 끌어주기까지 하는 엄청난 친절을 베풀고 유유히 갈 길을 갔다. 어두운 호텔 하늘에는 별이 한 가득 빛나고 있었다.
다음 날, 칼리보 공항 근처에서 전문 이동 업체 직원과 만나 차를 타고 항구로 갔다. 큰 배로 사람을 실어나르는 게 아니라 작은 배 여러 개에 사람들이 나눠 타고, 쉴 새없이 사람을 나르는 시스템이었다. 항구에는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는데 업체 직원의 수완이 좋았던지 금방 배를 탈 수 있었다. (‘내가 표 끊어올게, 먼저 들어가 있어’, ‘이따 저 로비에서 만나’, ‘따라와, 내가 아는 배가 있어’) 착착착. 절로 박수가 나왔다.
잠시 픽업 전문회사에 들러 일정 마지막 날 칼리보 공항까지 이동할 시간을 조율했다. 그리고 호텔 로비부터 라임 향기가 진동하는 라임 호텔에 짐을 풀었다. 보라카이에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보통 화이트비치와 가까운 헤난 가든 리조트에 많이 머무는데, 굳이 그 리조트를 고집할 이유는 별로 없는 듯 했다. 헤난 리조트가 다른 호텔에 비해 화이트비치와 엄청 가까운 것도 아니었고, 워낙 유명해서 항상 사람들로 넘쳐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일행은 살이 덜 보여서 야외에 걸어다녀도 무난하지만 옷에 젖어도 상관없는 옷으로 갈아입고, 한국에서부터 예약해둔 액티비티를 체험하기 위해 화이트비치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