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의 연속, 제주도에 혼자 가다
1년 전 쯤인가 경주로 여행간 적이 있다. 조금 이른 아침이었는데, 길을 걷다 우연히 새벽 안개가 스민 왕릉의 모습을 만났다. 갑자기 벅차오르고, 마음 한 쪽이 자꾸 울렁울렁한데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조심하며 왕릉 사이에서 상쾌한 공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이내 그 고요한 공간에서 한 걸음 한걸음 한참을 거닐었다. 분명 초등학교 졸업여행 때도 와 봤던 곳인데 왜 그때는 느끼지 못했는지 의아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랬다.
너무 좋은 것들은 그 가치를 알아보기 위한 영혼의 준비가 필요하다.
제주도에서 만난 용두암 역시 그랬다. 용두암은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 가장 먼저 들렸던 관광지였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해안가에 서있는 바위에서 용의 모습을 찾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어떻게 자연이 바위를 저렇게 멋지게 깎아둘 수 있었는지 몇 번이고 감탄하며 바라봤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신비를 캐내려 한참 애썼다. 옆에는 '저 바위의 실체가 사실 아주 오래 전 승천하려다 실패한 용'이라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허무맹랑했지만 믿고 싶어질 정도로 좋은 자연 풍경이었다.
용두암을 한참 보고 버스를 타러 가는데, '전국 택배 배달 가능'을 써 붙여두고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 그들은 이 곳에서 돈을 벌기 위해 전쟁같은 삶을 치뤄냈겠지. 때론 손님과 실랑이 하며, 때론 신이 나서는 귤박스를 전국으로 발송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굳이 용두암부터 귤 박스를 들고다니지 않아도, 집 안에서 제주 귤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로워진 일상이 그들에게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누군가는 도태되고, 누군가는 돌파하며 살아가듯 이들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나와있다는 건 열심히 돌파해가고 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김만덕 기념관은 최초의 여성 ceo로 불리는 인물의 업적을 조명하는 공간이다. 최근 알쓸신잡에 나와 인기가 높아졌다고들 하던데, 막상 방문했을 때는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김만덕 할망은 타고난 장사 수완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돈으로 기근에 허덕이는 수많은 이들을 구제한 인물이다. 남녀 차별이 심하고, 섬 사람은 육지로 나올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덕은 바다를 건너 왕의 귀까지 들어갔다. 모두가 그녀를 보고 싶어했다. 상을 내리겠다는 왕에게 김만덕 할망은 단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육지로 건너와 한양도 돌아보고, 왕도 알현하고, 금강산도 둘러봤다. 오랜 여행이 끝난 뒤 김만덕 할망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주에 돌아왔다고 한다. 역사가 앞다퉈 기록한 그녀의 생애와 업적은 지금도 이렇게 후대에 남아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녀의 생애 전반을 샅샅이 훑으며 받아들였다. 감동받았지만 어째서 이런 사람을 그동안 몰랐는지 의아했다. 아마 26년 넘게 서울에서만 살아서, 다른 지역의 역사나 이야기에는 큰 관심도 없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할망 덕에 나는 '서울 촌년'의 작은 경험 틀을 와그작, 깨부쉈다.
그 인물 자체도 이처럼 감동적이었지만, 기념관 자체의 시선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다. 기념관에는 김만덕 할망처럼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써 있고, 자원봉사 방법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과거에서 배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기념관에서 인상적으로 느꼈던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 삼성혈이다. 탐라국의 시조들이 나온 3개의 구멍으로, 1 년에 한 번 제사도 지내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나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어떤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들른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버스로 이동하기 편하고, 비행기 시간도 맞출 수 있는 곳들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삼성혈은 그런 여행 루트에 적합한 곳이었다.
비록 이처럼 불경스러운(?) 의도로 들어왔지만, 삼성혈은 무척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문 하나를 넘자 갑자기 고요한 숲이 펼쳐졌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바람이 나인지, 내가 바람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매표소에서 '먼저 들르시라'며 안내해준 박물관에서는 삼성혈의 유래 등이 적혀있었는데, 덕분에 이 숲속 한 가운데에 있다는 세 구멍의 이야기를 전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걷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듣고, 다시 또 걸음을 옮기는 과정들을 반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다듬어졌다. 그래서 마침내 공원 한 가운데에 있는 삼성혈 즈음에 다다랐을 때는 절로 정갈한 마음자세가 됐다.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세 구멍을 한참 바라본 다음 다시 뒤를 돌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제주에서 얻은 여유와 생각들을 주섬 주섬 챙겨들었다.
이제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