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의 연속, 제주도에 혼자 가다
제법 결연한 의지였다. 1주일 만에 다시 제주로 가는 길. 역시 그냥 여행은 아니었고, 머리 아픈 볼 일이 있는 외출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지난 주 비행기와 숙소를 미리 예매한 덕분에 좀 더 편안한 시간대로 집과 제주를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쾌적한 곳에서 잠도 잘 수 있었다. 사진으로 먼저 만난 숙소의 창 밖에는 초록초록 이파리를 가진 나무들이 반기고 있었다. 급여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갑도 든든해진 상태. 나의 제주 여행을 망칠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도 차를 빌리지 않았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 타고는 곧바로 숙소 부터 들러 짐을 맡겼다. 예약할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가 묵게 된 곳은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는, 장애인 자활시설 겸용 호텔이었다. 그나마도 '이렇게 저렴한데, 상태가 너무 좋네'하며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야 안 사실이었다. 알고 나니까 직원들의 사소한 장애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런 사실은 나의 여행을 오히려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호텔 로비에는 투박한 제주 감귤이 바구니 가득 담겨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올해 첫 귤이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제주 감귤을 물고 방을 돌아보면서 기분이 내내 좋았다.
일을 마치고 본격적인 제주 여행이 시작되었다. 가장 신뢰가는 정보는 '지인이 말해준 정보'-라는 경험칙에 따라, 우선은 지인이 강력 추천했던 금능해변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사실 유명하기로 따진다면 금능 해변보다는 그 옆에 협재 해수욕장이 더 유명하다. 하지만 금능해변의 지형이 내륙 쪽으로 들어가있어 바람이 덜 불고, 낙조가 특히 아름답다는 지인의 말에 혹했다. 낙조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는 건 이런 거였다. 바람이 불어오고, 잔잔한 파도와 아직 눈부신 햇살을 만끽하는 것. 그러다 잠시 후 바다와 하늘을 황금빛,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태양빛을 즐기며 남은 맥주를 들이키는 것! 내가 그토록 죽고 못 사는 '낭만 제주'의 완성이 될 거였다. 다만 낙조를 보기엔 너무 해가 쨍쨍한 시간이어서, 근처에 있는 석물원을 돌고, 저녁 밥을 먹은 뒤 낙조를 보자- 결심했다.
금능석물원은 40여년 간 돌하르방을 조각해온 명장, 장공익 선생의 작품들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표정으로 제주 민담을 재현해내는 석상들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특유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한적하니 석상들을 둘러보며 제주 바람을 맞는 기분이 꽤나 괜찮았다.
다만 석물원 자체의 스토리텔링이 이를 못 따라가고 있다는 아쉬움도 들었다. 제주 민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는 데다가, 그게 써져 있는 입구 안내판은 빛이 바래있었다. 글자도 많아 잘 눈에 띄지 않는 점도 문제였다. 사실 석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TV프로그램에 나온 적도 있는 곳이라는 광고가 더 커서, 자연스럽게 눈길이 그 쪽으로 갔는데 별 의미가 없어보였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나온 내용은, 벨기에에 '오줌 누는 소년'이 있다면 석물원 내에는 '똥 싸는 조각'이 있다는 건데.... 이미 빛이 바랜 안내 표지판 만큼이나 의아한 스토리텔링이었다. 둘이 있든 말든, 설령 똥 싸는 조각이랑 오줌 싸는 소년 동상이 친구라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람. 투덜 투덜.
소기의 성과라고 한다면, 제주도에서 똥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이유를 알았다는 정도가 될 수 있다. 옛날에는 뱀이 많이 나와 볼일을 보던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단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는 뱀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의 화장실에서는 돼지가 살게 됐다는 이야기. 그런데 막상 활자로 써보니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돼지와 뱀은 천적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무리 우연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하지만 왜 하필 돼지였는지, 정말 돼지는 뱀을 먹을 줄 아는 동물이었던 건지 물음표가 계속 따라붙었다.
석물원을 돌고 나서는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온라인에서 유명한 음식점에 들렀다. 가재나 소라 같은, 딱딱한 껍질 속 해산물을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곳이었다. 5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되어 있어 멈칫했지만 딱히 갈 데도 없어 일단 안으로 들어갔더니 재료들을 정리하는 젊은 남자 셰프가 있었다.
'현재는 파스타 종류만 가능하다'는 그의 말이 좌절스러웠다. 호화로운 저녁을 먹으며 돈을 펑펑 쓸 참이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일하며 깨달은 치트키(?) 중 하나를 시전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되묻는 것. "네?....음...파스타만 가능하다구요?...아 파스타만요?" 재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결국 "일단 앉으세요. 드시고 싶은거 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얻어낸' 식사. 신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청년 사장이 처음 가게를 열 땐 완벽한 저녁 시간을 맞이하기 위한 시간을 고려했을텐데 그 시간마저 스스로 어길 만큼 어려웠던 건 아닌지. 그런 마음을 굳이 파고들어 파스타가 아닌 다른 요리를 시킨게 못내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왕 시킨 거, 맛있게 잘 먹자 이런 생각으로 하우스 화이트 와인도 시켰다. 친절한 그에게, 더 친절한 손님이 되어 식탁 정리까지 완벽하게 마무리짓고 나왔다.
제주 낭만의 하이라이트, 금능 해변은 생각보다 썩 좋지 못했다. 구름이 많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황금빛 해변은 고사하고 서있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금능 해변은 이전에 왔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파도가 길가 쪽으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어서 '이 해변, 무서워'하고 말했던 것이다.
마을 길을 돌 때마다 목줄 풀린 강아지들이 나와 놀아달라며 다리를 쳤다. 귀여웠지만 강아지가 칠 때마다 몸은 마음과 반대로 연신 휘청거렸다. 카메라를 든 나의 모습이 마치 놀아주는 것처럼 보였는지 눈을 반짝이던 녀석들은 이내 별 볼일 없다는 걸 알고 다시 제 집을 향해 갔다. 금능해변에는 어느 마을 이장님이 세워뒀다던 돌 하르방이 삐뚜름하니, 외로히 서 있었다. 역시 바람에 몸이 흔들릴 정도여서 바다를 보며 마시려던 캔맥주는 가방에 넣고 한참을 서있다 숙소로 돌아갔다.
이날 달은 유난히도 크고 밝았다. 나는 숙소 내 모든 불을 다 끄고 바다를 보며 마시려던 캔맥주와 귤을 까먹으며 내내 저녁 달을 봤다. 제주에서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