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홀로, 제주 1/3

낯섦의 연속, 제주도에 혼자 가다

by 미지의 세계

'완벽한 휴식'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일종의 로망같은 건데, 일단 햇살 가득한 방 안에서 눈을 떠야 한다. 창문 밖에 잔잔히 펼쳐지는 바다 풍경, 또는 숲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내린다. 아침밥은 무조건 브런치. 소세지 구이와 식빵, 몽글몽글한 스크럼블 에그를 예쁜 그릇에 담아 먹고는 느긋하게 잡글도 쓰고, 책도 보는 휴식.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특히 삶이 지칠 때면 이런 공간과 휴식을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이런 망상이 벌써 몇 년째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다보면 문득 깨닫는게 있다. 이 꿈에 타인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참 좋아하지만 정작 그 행복에 다른 사람이 함께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니. 아마도 이 '완벽한 휴식'을 완벽하게 공유해 줄 타인을 아직 못 만난 탓이 크지만, 설령 그런 타인을 만나도 혼자 여유를 오롯이 즐기고 싶은 마음인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나 사실 개인주의자야' 하고 배짱좋게 고백하고 다닌 데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다.


# 로망 실현, 나 홀로 제주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 로망일 터. 하지만 나의 로망은 얼마 전 현실이 될 기회를 얻었다. 1박 2일 씩, 2주 동안 제주도에 혼자 다녀오게 된 것이다. 순전히 일 때문이었지만 약간 흥분되었다. 드디어 내 꿈이 실현되는 건가, 싶어서다. 그런데 이내 문제가 생겼다. 우선 내 로망을 실현시켜줄 쾌적하고 풍경 좋은 숙소는 혼자 1박을 묵기에 너무 비쌌다. 일정 상 거기서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니고 잠만 자고 나와야 하는데, 침대 한 칸을 빌리기 위해 쓰기에는 가격대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또 내 스케줄에 맞는 비행기가 없었다. 2-3시 쯔음 광주로 돌아오는 편도 비행기표가 왜 이리 없었는지. 나중에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눈 앞에서 출발하는 광주행 비행기를 몇 개나 보내며 벙찌는 느낌이 들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비행기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약이 되어있었던 것 같았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10월 말 즈음의 제주는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모든 등산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나처럼 당장 며칠 뒤에 타야 할 비행기를 예약한다는 건, 좋은 시간대에 저렴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그냥 포기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백번 양보해 광주와 길이 좋은 인천, 김포 공항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결과는 실패. 그나마 저녁 6시에 있는 부산행 비행기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일은 늦어도 1시 안에 끝날 텐데 저녁 6시 비행기, 그것도 부산행 비행기라니. 광주와 부산을 오가는 길은 오랫동안 쌓여온 심리적 거리 만큼이나 아득하게 멀다. 1시간 비행과 4시간 버스 여행. 벌써 까마득해졌지만 대안이 없어 한숨을 푸욱 푸욱 내쉬며 그대로 예약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다음 여행 교통편을 미리 예약해버렸다. 외양간을 고쳤으니 다음 주는 편하겠지. 아, 물론 지갑은 한없이 텅텅 가벼워졌지만.


# 우주 공강 채우기

어찌 저찌 볼 일을 다 보고나니 이제는 막연하게 퍼져있는 시간만이 남았다. 대학시절, 클릭에 실패해서 2-3 시간씩 비어있는 시간표를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그런 걸 '우주 공강'이라고 하곤 했다. 처음에는 그 '우주'에서 뭐라도 하려고 발버둥 치지만 나중에는 그냥 죽이기만 했던 시간들. 일단 버스는 버스대로 두더라도 비행기가 뜨기 까지 6시간이 남아있었다. '이참에 혼자 바다로 가볼까'. 제주 시내 버스에 오르며 잠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나도 나 홀로, 뭔가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구나!


그러나, 그 설렘은 얼마 가지 않았다. 일단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내렸는데, 해물라면을 대충 먹고 나니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커피를 마시자니 이미 일을 하면서 많이 마셔서 더 마시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바다에 발이라도 담그자니 날이 너무 흐렸다. 무엇보다도 삼삼 오오 모여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해변을 혼자 걷는 일이 유쾌하지 않았다. 바다에 덩그러니 있는 조형물도 짝궁이 있는데 난 혼자구나. 갑자기 조금 서글퍼 나는 괜히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싱겁게 안부를 물었다. 자연스럽게 머리는 푹 숙여졌고, 그렇게 조금 더 걸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속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먹고 무작정 걸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불렀고, 공항을 향해 갔다. 그 때가 3시. 비행기가 뜨기 까지 3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1. 바다 속 조형물도 둘인데, 나는 혼자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봤던 등대. 2. 제주 해물라면. 외로움과 상관없이 진짜 맛있었다.


면세점도 구경하고, 기념품 가게도 몇번 들락날락 거렸다. 하지만 죽이려고 노력할 수록 안 죽는 것이 시간이었다. 작전을 변경해 그동안 쓰고 싶었던 잡글도 쓰고 e-북도 실컷 봤다. 그렇게 겨우 2시간이 지났지만 비행기 이륙이 지연되는 바람에 나의 자유시간(?)이 계속 늘어났다. 점점 시간이 주는 선물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지루하고 외로워 몸이 뒤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잡글은 두 개나 썼고, 일도 어느정도 해놨고, 할 일 다했는데 왜 나는 혼자인 거냐고! 그제야 나는 새삼 로망을 실현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여곡절 끝에 탄 비행기는 눈을 감았다 뜨니 순식간에 부산이었고, 광주행 버스에 겨우 올라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광주에 와 있기를. 밤은 깊어가고, 홀로 다녀온 나의 1박 2일 제주 기억은 그렇게 심심하고 밍밍한 감각만을 남기며 흐려져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지난 여름, 몽골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