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온 책을 아직 돌려주지 못했다

남은 다정함에 대하여

by 미지의 세계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시기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12월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올해 고마웠던 분들에게 길고 짧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일상을 살면서 새로운 글을 거의 매일 써내자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건 따뜻함이 담긴 답장 덕분이었다.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비슷한 따뜻함으로 화답해 주었던 것이다. 글자로 이뤄진 마음에 둘러싸여 들뜨고 따뜻한 연말 분위기를 만끽했다.



연말 인사로 이뤄진 그 편지들은 사실, 오래 미뤄둔 마음의 부채를 정산하는 일이기도 했다. 방송국에 재직할 때 일이다. 담당했던 코너물 중 하나가 문화 전시와 공연을 소개하는 꼭지였다. 대부분 전시장 측에서 보내준 사진으로 화면을 구성했지만, 가끔은 직접 가서 그 전시를 보고 영상과 사진을 찍어오는 열정도 있었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을 쓰다 보면 정말 그 전시에 대한 흥미가 커지기도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사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외출 게획을 세웠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점심시간을 쪼개야 했다. 회사에서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그의 열렬한 팬까진 아니어도, 나희덕 시인은 나를 처음으로 울린 시인이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우연히 <못 위의 잠>이라는 시를 봤는데 부모님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시 속의 가족처럼 고단한 생활을 하지 않았음에도 구절들이 와닿았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마음을 울리는 시인은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기록했을지 궁금했다. 차를 옆 골목에 잘 대고,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처음 눈에 보였던 것은 시인의 작업실을 재연해 둔 공간이었다. 눈을 돌려 처음부터 차분히 보려던 찰나, 입구 옆에서 웬 여인이 일어섰다. 그는 식사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ㅇ방송국 ㅇㅇㅇ입니다. 편히 식사하세요. 저는 전시 좀 둘러보고 사진도 조금 찍어가겠습니다. 내일 아침 뉴스에 간단히 소개를 하려고요..."


평소 하던 대로 양해를 구하고 혼자 둘러보려는데 그녀가 가까이 왔다.


"안녕하세요. 나희덕입니다."


순간 숨을 헉 들이켰다. 시인은 식사를 했느냐고 친절히 물어봐주었다. 그리고 마시던 와인을 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차를 가지고 왔던 터라 아쉽게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좋아한다면서도 정작 그는 알아보지 못해 혼란스러워졌다. 얕게 알은체 한 것을 들킨 것만 같았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사진들은 제가 ㅇㅇㅇ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그녀는 이내 친절하게 사진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말을 꼼꼼히 핸드폰으로 기록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아주 성실히 답을 해주었다. 평소엔 사진만으로 간단히 전시 소식을 전하지만, 너무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직접 영상도 찍었다. 그럼에도 핸드폰 카메라를 가로로 들고 있는 그 손이 그날따라 유독 좀 쑥스러웠다.


필요한 취재가 다 끝나고 나서야 나는 <못 위의 잠>이 정말 너무 좋았다고 겨우 말했다. 시인은 고맙다면서 당시 새로 발간된 산문집을 건넸다.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던 책이었다. 거듭 괜찮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럼 빌려주는 걸로 해요. 나중에 다른 책으로 가져오시면 되지."

"아... 감사합니다."


무슨 책이든, 다시 책을 돌려드리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며 그의 책을 받아 들었다. 맨 앞장에는 사인도 받았다. 다음날 뉴스에 나간 것은 고작 몇 문장의 짧은 뉴스 꼭지였지만 그래도 마음이 충만했다. 좋아하던 시를 직접 쓴 다정한 분과 시간을 보낸 것이 정말 기뻤다. 책을 다 읽고 감상문까지 써서 드리고 싶다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결심은 금방 힘을 잃었다. 결국 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전시장에 다시 돌아가기는커녕, 바쁘다는 핑계로 시인이 준 책을 한동안 새 책 그대로 책장에 꽂아두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전시 기간은 다 끝나있었다. 뒤늦게 책을 펼쳐 들었고 결국 완독 했다. 그럼에도 감상문을 써서 보낼 열정은 이미 사그라든 뒤였다. 메일이라도 드릴까 생각만 한 것도 여러차례였다.

한참 후에 그가 타 지역 대학의 교수로 이직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분과의 시간이 정말 좋았는데, 감사하다고 꼭 말하고 싶었는데-. 때를 놓쳐버린 다정함이 잘못 온 택배처럼, 마음 한켠에 불편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마음의 짐을 오래 바라보았다. 고마운 일과 미안한 일, 감동받은 일 등을 상대에게 직접, 늦지 않게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은 어쩔 땐 잘 지켜지고, 어쩔 땐 잘 지켜지지 않는다. 다정함을 표현하는 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기에 그런가 보다. 가만히 있으면 편하니까 자꾸만 표현하기 귀찮아진다.


그럼에도 요즘은 그 귀찮음을 자주 이긴다. 아이들이 나의 표현들을 전부 흡수해서 그대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맑고 투명하게 나의 말투와 표현을 그대로 비추는 작고 귀여운 거울들. 거울들이 와서 종알종알하며 안긴다.


"아빠, 잘 잤어요? 좋은 꿈 꿨어요?"

"엄마, 뽀뽀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안아주고 싶어요."


결국 스스로가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듣기 위해서, 계속 다정하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의 좋은 점과 배울 점을 찾아 글로 남겨주고, 고맙고 미안했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럼에도 채 다 못 다한 말은 연말에 부랴부랴 몰아 한다.


이 글을 여기까지 쓰고는 불현듯 생각난 인연에게 또 긴 편지를 써서 보내고 왔다. 글로 남기는 다정함이 가장 먼저 내 눈으로 들어왔다.





시인께 직접 선물받은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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