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부터 부장님이다

by 미지의 세계

첫 직장생활을 타지에서 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지역 청년들이 모이는 독서모임에 나갔다. 젊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러하듯, 꼭 책만 읽는 모임은 아니었다. 인근 대학교의 축제날 역시 사교의 장이 되었다.


이미 다 직장인이었던 우리는 캠퍼스에서 틀어주는 야구 중계를 보며 함께 치킨을 먹기로 했다.


"야, 예쁜 애들 있으면 알려줘."


함께 있던 오빠가 농담 삼아 말했다. 우리도 장난스럽게 야유를 퍼부었다.


"오빠는 학교 선생님이면서 그런 말 하고 싶어요?"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물론 그의 직업은 방금 전 말과 아무 상관없었다. 또 그가 실제로 이 캠퍼스에서 자신의 짝을 찾을 거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란 직업에 거는 기대라는 게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 역시 그런 기대를 알고 있단 듯 말했다.


"야, 야. 조용히 해. 선생님이라고 하지 마. 난 지금부터 부장이야. 부장님이라고 해."


오랜 시간 선생님은 의지하는 상대였다. 동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지인의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건 거의 신화적 존재가 사실 내 이웃이었다는 정도의 충격과 같았다. 선생님은 특히 교실에서는 거의 신과도 같지 않나. 갈등 상황을 조정하고, 모르는 걸 알려준다. 그런 사람이 교실 밖에서는 어떤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선생님도 교탁을 내려오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



문득, 학창 시절 스친 어떤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분은 우리 고등학교의 지리 선생님이었다. 서울대를 나왔다고 해서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관심을 많이 받던 분이었다. 그런데 몇 달 뒤, 그분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 사정이라고 이유를 들었지만 분위기를 봐선 동료 선생님들도 그분의 퇴직을 조금 어리둥절하게 여기시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시기 전에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칠 줄 몰랐는데... 내가 기대했던 삶인지는 모르겠네."


다른 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선생님의 그 마지막 말이 아마 퇴직과도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하다 불현듯 자신의 새로운 꿈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근데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꿈을 찾아갔을까? 낭만 있다.'


동그랗고 단정한 선생님의 모습 위로, 낭만 찾아 떠나는 어떤 30대가 겹쳐졌다. 그게 다였다. 그 뒤로 해당 선생님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니 감상이 좀 다르다. 나 역시 회사를 다니고,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미래의 모습과 이상적인 꿈을 고민한다. 수업 중에 개인적인 고민이 흘러나올 정도로 절실했던 그 선생님은 지금쯤 무슨 일을 하고 계실지, 그토록 원하던 꿈은 찾으셨는지 궁금하다.



회사원이 되고 나서 대학교 모교에 간 적이 있다. 교수님이 나와 비슷한 꿈을 꾸고 있는 후배가 있다면서 소개해주시겠다고 했다. 그래도 학교 후배를 보는데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회사 수첩을 챙겨갔다. 그랬더니 그 수첩을 본 교수님이 말했다.


"오, 나도 하나 줘!"


교수님은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편한 마음으로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는데 교수님이 말했다.


"야, 나는 요즘 프로젝트 따내려니까 죽겠다. 회사라고 하긴 뭐 하고, 어디 연구 팀에 있거든. 이번 프로젝트를 따내야지 연구비가 나오는데 보통 일이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교수님의 지친 표정과 구겨진 셔츠 등이 보였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회사에서 하루를 버티고 돌아오는 당시의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이 비싼 저녁이 그의 고된 하루 끝에 나온 건 아닐까 싶어 미안해졌다. 밥값을 내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는 없다며 손수 카드를 냈다. 그래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담아 커피를 샀다.


대학의 미디어과 교수와 예비 언론인, 그리고 현직 방송인은 카페에서 미디어 환경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헤어졌다. 토론은 학부생 시절에도 하던 일이었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업계 선배를 만난 것 같은 편안함과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들의 나이를 지나며 이제야 알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늘 답을 알고 사는 일이 아니라, 확신 없는 얼굴로도 누군가 앞에 서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나 역시 직장에서 누군가에게는 선배이자 동료이고, 아이에게는 엄마다. 외부인에게는 과학해설사다. 자주 선생님의 역할을 하고, 선생님이라고 불린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어릴 적 올려다보던 선생님들도 굳은 심지가 없는 날, 그저 책임감 하나로 하루를 버텼을까.​ 어쩌면 그게 어​른이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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