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말고, 행간을 보란 말이에요

by 미지의 세계

재수 학원의 영어 선생님은 종종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르곤 했다. 잠자는 학생들을 깨우기 위한 조치였다. 가장 자주 언급되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단어 말고, 행간을 보란 말이에요! 이 context (글의 맥락)을 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왜 그 단어만 꽂혀서 난리냔 말이에요!"


수능 지문을 풀 때 아는 단어 몇 개에 꽂혀서 오역을 하는 학생들을 보며, 선생님은 무척 답답해하셨다.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그렇게 소리 지르는 선생님은 캐릭터 같이 귀여웠다. 외형적으로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에 나오는 코치님을 닮으셨다. 그가 소리치면 더욱 비슷해졌다. 학문적인 일침으로 잠을 깨우려던 선생님은, 다른 매력으로 학생들을 깨운 셈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이 소리칠 때마다 피식 웃으며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그의 말을 잠자코 듣긴 했지만 사실, 문제를 풀기 위해 '맥락을 보라'는 말은 조금 게으르게 느껴졌다. 모르는 단어를 끝까지 파고들지 않아도 얼추 답을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때려 맞힌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식의 풀이는 오답의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떤 단어가 읽히지 않아 멈출 필요가 없어 안심이었다. 당시 나는 모든 지식을 다 알아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다시 수능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영어 선생님의 외침은, 비록 오답의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는 열쇠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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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프리랜서 방송인, 현직 남매 엄마이자 과학해설사.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해요. 매일 검열하고 싸우면서 문장을 써요. 그래도 결국은 따뜻하고 재미있는 글쓰기를 소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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