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목소리는 비타민 같았다.

by 미지의 세계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수수한 옷차림에 조근조근한 말투, 이지적인 느낌이 있는 분이셨다. 당시 친구들끼리는 '80년대 문인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분은 대체로 수줍게 웃고 다녔지만 문학을 가르칠 때만큼은 목소리와 눈빛이 날카로웠다. 처음엔 수업 전후 선생님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 없이 자주 그분이 생각났다.


일부러 그분이 수업 중인 교실을 기웃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청소 지도를 하고 계시면 기둥 뒤에 몰래 숨어 봤다. 교과서를 예습해서 질문 거리를 잔뜩 만들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앞에 서면 쑥스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말도 더듬었다.



풋풋한 첫사랑의 정점은 스승의 날이었다. 당시에는 교실마다 가루가 날리는 분필을 사용했는데, 그걸 끼울 수 있는 케이스를 세트로 사서 선생님 자리에 두었다. 그러다 편지가 없으면 누가 줬는지 모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급하게 편지를 써서 다시 자리로 갔다. 하필 당사자가 이미 선물을 확인하고 계셨다. 하는 수 없이 그분의 차 문에 편지를 꽂아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고, 어색한 선물 전달이었다.



선생님은 선물을 받고도 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자, "그거 너지? 잘 받았다. 고마워."라고 하셨다.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도망갔다. 선생님이 그 케이스를 정말 쓰셨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로도 한동안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유독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


"이따 점심시간 전에 잠깐 자리로 와. 줄 게 있어."



선생님이 준 것은 책이었다. 김열규 교수의 '독서'라는 에세이였다. 고등학생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았다.


"너는 글 읽는 걸 좋아하지? 고 3이 되어서도 책을 놓지 마."


선생님이 선물을 건네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선물보다 눈에 꽂혔던 건 함께 들어있었던 카드였다. 모든 관심이 순식간에 그 작은 봉투로 쏠렸지만, 왜인지 당사자 앞에서 그걸 읽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교무실을 나서자마자 카드부터 열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네 목소리는 비타민 같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짧은 글이 있었다.


교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조금만 뛰면 날아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게 힘들었다. 당일에는 수십 번, 이후에도 오래도록 선생님의 카드를 읽었다. 이내 편지 속 모든 문장을 외워버릴 지경이 되었다.



'왜 내 목소리를 비타민 같다고 했을까?'


당시의 나는 '비타민'이란 표현을 선생님의 애정으로 오해했다. 그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기대가 됐다.


물론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선생님은 여고에서 다양한 학생들을 겪은 남자 선생님이셨고, 나는 기껏해야 인사 잘하고 예습 잘 해가는 학생이었다. 속으로는 누구보다 그분을 좋아했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선물을 주고받은 후에도 우리 사이의 변화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한 문장을 붙잡고 오랫동안 의미를 덧붙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표현은 지금 생각해 보면 격려였던 것 같다. 당시 선생님의 나이와 비슷해지고 나니 더욱 그렇다. 입장을 바꿔본다면 나를 좋아하는 티가 나는 한참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네 마음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상관없이 너는 잘 커가고 있다.'


마지막에 책을 건네며 '나중에도 독서를 놓지 말라'고 격려하신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참 섬세한 거절이자 선긋기였던 셈이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거절해 주셔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 이 첫사랑의 결말도 적어두려 한다. 학교를 졸업하면 선생님부터 찾아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듬해 재수를 결정하게 되면서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 하루하루 버티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그 해 겨울, 수험표를 받으러 오랜만에 모교에 갔을 때 선생님은 없었다. 그분이 계약직이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후 선생님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첫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과거가 되었다.



지금도 본가에는 선생님의 카드와 책이 남아있다.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 '네 목소리는 비타민 같았다.'를 보면 지금도 마음이 쿵쿵 뛴다. 그곳에는 어릴 적 풋풋하고 서툰 첫사랑의 기억, 그리고 마음을 의젓하게 감싸주던 어른의 마음이 함께 있다. 카드를 펼치면 '거리를 좁히고 싶었던 학생'과, '사이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한 선생님'이 보이는 것만 같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도 사람을 아낄 수 있다는 사실이, 선생님의 문장처럼 지금도 내 안에 남아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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