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설명하는 키워드 3개, 자기소개
만약 당신이 나를 오늘 처음 만난다면, 대부분의 경우 ‘또각 또각’하는 구두 소리를 먼저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덩치가 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다소 수줍은 표정의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통성명을 하면 ‘이름이 좀 특이하네’ 생각할지도 모르고, 그 이름과 유사한 몇 가지 농담 (‘오미자’, ‘이미자’, ‘이미지가 좋네요’...)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당신이 던지고 싶은 농담은 이미 564329번째 들은 내용이지만, (당신이 글을 읽는 지금, 누군가에게 564330번째 이름 관련 농담을 듣고 있을지 모른다.) 마치 처음 듣는 듯 연신 웃어대는 나를 보며 오히려 조금 당황할지도 모른다. 아니, 좋아하려나.
자,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당신을 위한 글이다. 썰렁한 농담 따위를 던지지 않아도 나를 알 수 있도록 썼다. 물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또 아마도 큰 확률로 나는 당신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소개하는 나를 봐주길 바란다. 아마도 우리는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하이힐을 신은 날, 그 날은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평소 탐내던 엄마의 여름 구두를 꺼내 신고 책을 빌리러 동사무소에 갔다. 아슬아슬 얼음길 위를 위태롭게 걸으면서도 어찌어찌 동사무소 앞 계단까지 다다랐고, 잠시 숨을 골랐다.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다리가 미친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평소 익숙지 않은 구두를 꼿꼿이 신고 걸은 탓이었다. 신발을 벗어던져 버릴까 한참 고민했지만 그럴 경우 맨발로 집까지 걷기도 아득했기에 체념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동사무소 안에 들어섰다. 자원봉사를 하시던 아주머니의 시선이 내 발치에 멈춘 순간,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엄마 신발을 신고 왔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10대 소녀는, 계절에도 맞지 않는 어른 신발을 어색하게 신고 와 스스로가 고작 어린애일 뿐이라는 걸 새삼 증명한 셈이었다.
창피했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각자 나이에 맞는 신발이, 옷이, 역할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뒤로 다시는 어른들의 물품을 탐내지 않았다. 아직 어린애인 스스로의 상태를 인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창피한 순간이 오히려 한 뼘 더 자란 시점이었다고 믿고 있다. 욱신거리던 다리가 일종의 성장통이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굳이 엄마의 신발을 훔쳐 신지 않아도 하이힐을 매일 신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그 겨울날 만큼이나 강렬한 성장통은 겪지 않는다. 생물학적 나이로 봤을 때 하이힐을 신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데다, 스스로도 이 미묘한 신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20대 후반인 지금도, 철없던 10대 소녀처럼 제 나이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묘기를 펼치고 있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나 알 수 있을테니 그런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나는 하이힐을 자주 신는다. 여기에는 어릴 적 어른을 동경하던 소녀와 성장통, 약간의 아쉬움과 미래에 풀릴 궁금증까지 나의 모든 시간이 담겨있다.
다음은 가장 좋아하는 것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나는 술을 참 좋아한다. 막상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먹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완벽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두고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솔직히 풀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맥주는 도수가 약해 오랫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맛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런 별명도 붙여줬다. '세계 맥주 애호가'
거대한 왕관에는 그에 맞는 책임감도 따르는 법. 스스로 붙인 거대한 칭호에 부합하기 위해 공부를 조금 했다. 맥주의 모든 것을 분석해 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독학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맥주의 향을 뜻하는 '아로마', 풍미를 뜻하는 '플레이버' 등의 요소로 맥주를 분석, 평가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맥주 향을 '빵 굽는 냄새'나 '꽃 향'따위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대부분의 맥주 이름이 처음 만들어진 지역이나 양조장 이름을 따온다는 것도 신기했다. 편의점에서 골라온 맥주를 들이키며 이 맥주의 이름은 어떻고, 향이 어떻고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헤롱헤롱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책을 반납해야 하는 시점이 왔고, 그렇게 맥주 공부는 차마 완성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완벽한 전문가가 되지 못해 아쉽기도 했지만 맥주의 맛과 향, 감정 등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또 다른 행복을 주었다. 아직 개척해야 할 맛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명확한 목표가 있는 삶은 행복한 법, 인생의 진리를 다시 깨우친 순간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읽고 나면, '뭐야, 이 인간 주정뱅이야?'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의 활력이 될 만한 것들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자괴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하루들만큼 몸서리쳐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남들이 볼 때는 무의미해 보이는 뭔가가 나를 무척 행복하게 만들 때, ‘왜 이런 하찮은 것을 좋아하지?’ 라는 생각은 스스로를 갉아먹기 좋다. 돈도 안벌리고, 건강해보이지도 않는, 소위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일에 시간과 돈을 들인다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맥주를 마시는 일’이 행복하다는 것,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감히 고백하고 있다. 그냥, 행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왜 이리 술을 퍼마시니!'하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앞으로도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적당히 즐기며 살고 싶다.
이번에는 좀... 닭살 돋는 이야기부터 해보려 한다. 매력에 관한 부분인데, 미소가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얼굴이 아니라 미소. 미소는 예쁠 수 있잖아요?) 평소에 잘 웃어서 주름이나 얼굴 근육이 잘 잡힌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는 분석하고 있다. 확실히 나는 웃음이 좀 많은 편이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거의 웃음부터 먼저 나온다. 물론 억지로 웃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썰렁한 농담을 던지면, 농담 자체가 웃기다기보다는 1)그 이야기를 한 사람의 뻔뻔한 표정과 2)주변의 썰렁한 반응, 3)잠시의 침묵과 4)약간의 야유 가 완벽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개그 콩트같이 느껴진다. 결국 아랫배부터 뭔가 간지러운 반응이 오고, 결국 빵! 하고 웃어버리는 것이다. 하하.
이런 것들은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작고 사소한 감정도 캐치해내는 능력이 발달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 여행을 좋아해서 자주 낯선 곳으로 떠난다. 그런데 여행을 다니면서 스스로가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동을 잘 받는, 이른바 ‘감동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주’하면 ‘첨성대와 왕릉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의 바람’이, ‘제주도’하면 ‘비를 피했던 비자림의 나무 향기’가 떠오르는 식이다. 덕분에 평범한 일상에서도 종종 소소하게 웃을 수 있고, 기억해야 할 추억들이 많아진다. 또 무표정인 사람들을 봐도 그 안에 담긴 따스함과 귀여움, 소소한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 그랬다. 행복은 사소한 곳에서 오는 거라고. 그의 말에 충분히, 온전히 공감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만약 내가 당신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웃는다고 해도 당황하지 말고 그냥 같이 웃어주길 바란다. 당신이 가진 분위기가 좋고,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유쾌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섬세하게 꼭꼭 씹어 천천히, 마음껏 즐겨줬으면 한다.
자, 여기까지가 나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차마 못 쓴 이야기들도 많다. 이를테면 멍이 든 자국을 조심히 꾹꾹 눌러보는 기이한 버릇이라든지, 쓸데없이 고민이 많이 잠을 종종 설친다는 식의 이야기 등 말이다. 하지만 너무 조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당신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머리를 빗고 옷과 신발을 골랐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가장 잘 나타내면서도 호감을 주는 인생 단편들을 고르기 위해 한참 고민했고, 남몰래 광을 내 가져온 건 200% 사실이다. 이런 내가 더 알아가고 싶어지셨는지. 만약 그렇다면 좀 더 가까이 용기내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아마도 우리는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