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크게 크게 그리자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면 어떨까' 비슷한 생활을 반복하면서 무료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평소 SNS를 하면서 봤던, 인터넷 취미 강의 사이트가 떠올랐다. 그 사이트를 몇 번 훑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수업을 구매했다. 여행지의 모습을 수채화로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강의였다. 한 곳에 앉아있으면 엉덩이에 뿔 나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것도 주춤하던 시기였다. 눈으로 여행지를 훑어가며 그림으로 남기다보면 좀 더 색다른 여행을 다시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취미는 장비빨(?)이라고 했던가.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고체물감과 붓, 펜, 그리고 수채화용 수첩을 샀다. 나란히 펼쳐놓고 보니 너무 뿌듯하고 기분 좋아서 이미 여행을 몇 번이라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그림도 잘 그려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마음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이왕 온라인 강의까지 구매한 거 기본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수업은 펜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부터 시작했다. 얇은 펜을 잡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수채화 밑그림은 편안하게 슥슥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자세가 불편하면 야외에서 그림을 계속 그리기가 어렵고, 여행 중이라면 그림을 그리다 시간이 한정 없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깨가 앞으로 쏠리면 손목과 팔에 무리가 가서 오래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 다음은 ‘사물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려보기’를 하는 시간. 눈은 사물을 천천히 일정 방향으로 훑고, 손은 종이에 눈과 똑같이 그림을 그려내는 훈련이다. 이때 포인트는 절대 종이를 봐서도, 펜을 종이에서 떼어서도 안 된다는 것. 눈이 사물을 관찰하는 속도와 손의 속도를 맞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이를 보지 않고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온라인 강의에서는 처음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라 괜히 두근거렸다.
“잠깐! 종이를 보기 전에, 심호흡을 하세요. 처음에는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나’ 싶으실 거에요. 하지만 ....” 그림 그리기가 끝난 뒤, 선생님의 멘트를 못 기다리고 작품을 봤다. 이어, 왜 선생님이 그런 말을 구구절절 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엉망이었다. 실물보다 크기가 작았고, 끊어진 선들도 몇 개 보였다. 무엇보다도, 쭈그러져 있었다. 물론 찌그러졌다, 는 말이 표준어인 건 알지만.... 정말 내 그림은 쭈그러져 있었다. 오마이 갓..
참고로 이 훈련을 하고 나면 크게 세 가지 유형의 그림이 나온다. 실물보다 크기가 작게 그려졌거나, 비슷하게 그려졌거나, 크게 그려진 그림이다. 눈으로 훑은 사물과 그림 크기가 비슷한 사람이 제일 나은 사람이다. 눈과 손의 속도가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이후에 그림을 그릴 때도 특징이 잘 드러난 그림을, 적절한 시간 내 완성할 가능성이 크다.
나같이 그림을 작게 그린 사람은 눈이 손보다 빠른 사람이다. 그러니까, 눈은 이미 저만치 가고 있는데 손이 그걸 못 따라간 거다. 신중한 성격일 수도 있고 바꿔 말하면 소심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림을 망칠까봐 조심스러웠을 거라고. 그런데 오히려 이런 마음이 손에 힘이 들어가도록 한다는 이야기였다. 고작 간단한 테스트 하나였을 뿐인데, 그림에도 나의 습성이 이렇게나 드러난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좀 쑥스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 취미 수업 첫 시간은,
정말, 망했다.
“그림은 망치는 건 없어요.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망친 것들을 잘 수습할 수 있는지 배워갈 거에요.” 밑그림을 그릴 때 연필은 절대 안 쓸 거라고, 선생님이 말을 이어갔다. 대신 펜으로 잘못 그린 부분을 어떻게 멋지게 바꿀 건지 알려주겠다고, 그런 방법들을 배워가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수업 한 챕터가 끝났고, 영상은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다음 수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미션은 이전 수업에서 그려낸 그림을 댓글로 올리는 거였다. 엉망 진창인 그림을 찍어 댓글로 올렸고, 잠시 하늘을 봤다.
펜으로 그린 그림은 돌이킬 수 없다... 이 문장을 되새기며, 내가 무료하다고 느껴온 최근의 삶을 생각했다. 평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해내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갑자기 많은 일을 떠안는 바람에 슥슥, 마무리짓고 떠나보내는 일들이 많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는 완벽주의자인지라 그게 어지간히 스트레스였다. 원래 그려왔던 궤적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자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고 지쳤다. 결국은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을, 책임감을, 긴장을 팍 놔버린 거였다.
이미 넋 놓고 그려버린 수 개의 선(택)들을 내려본다. 어깨에 힘을 빼고, 긴장을 풀고, 선 끝에 집중해 다시 펜을 대 본다. 한번 잘못 그어진 선을 잘 수습하면 정말 선생님 말대로 '키치'하고 '힙'한 그림으로 완성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려볼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