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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Dec 30. 2022

수많은 언어를 데리고, 네가 왔다

22년 10월 27일 출산을 하고 나서

 아이를 낳았다. 신생아의 배꼽시계는 낮과 밤이 없는 거여서 한동안 비몽사몽 유축기에 가슴을 맡기고 졸 때가 많았다. 유축기 깔때기 속 공기가 압축됐다가 풀리면서 쿠쿤 쿠쿤 소리가 났다. 심장소리 같았다. 마치 심장의 일부를 가슴에서 꺼내는 기분이 들었다.


 연노란색 모유는 실제로 엄마의 혈액에서 시작된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젖샘에서 피를 걸러내 만든 것이 모유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자식을 피, 땀, 눈물로 키워냈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내가 땀 흘리면서, 울며 졸며 짜낸 이 액체가 아기의 피와 살이 다.



 단순히 문학적 표현인 줄 알았던 말들이 육아를 하며 온몸으로 체감되는 경험을 한다. 예를 들어 손목과 허리가 남아나질 않는다는 말. 그만큼 힘들다는 거겠지, 했는데 3kg짜리를 들었다 놨다 하면 곡소리가 절로 난다. 진짜로 이대로 가다간 허리뼈와 손목뼈가 어딘가 고장 날 것 같다. 사실 벌써 뼈마디가 아프다. 글을 쓰는 지금 아이는 5kg를 넘어 갈수록 무거워지는데 한동안은 더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야 한다. 임신 기간에 코어 운동이나 열심히 해 둘 걸 싶다.


 또 아기 똥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진다는 말. 그만큼 아기가 예쁜가, 호들갑스럽다며 혀를 쯧쯧 찼는데 아기 똥은 진짜 별 냄새가 안 난다. 생각해보면 먹는 게 모유나 분유뿐이니 냄새날 것도 없다. 참고로 나는 비위가 약해서 음식물 쓰레기도 꼭 남편을 시켜 밖에 버리는데, 아기 똥은 기저귀를 갈다 묻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스스로 놀란다. 내가 엄청난 모성애를 가졌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비유적 표현으로만 여겼던 언어들이 사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돼서, 이를 부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아이를 볼 때 느끼는 내 마음을 뭐라고 해야 좋을까. 사랑? 초등학때 만화 동아리에 든 적이 있는데, 하루는 ‘사랑해’라는 말을 50가지 장면으로 그려보는 과제가 있었다. TV나 책에서 본, 연인 간에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모습을 서툴게 열몇 가지 정도 그렸을 때 도무지 그다음은 채울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 옆에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교실을 한 바퀴 돌고 나온 선생님이 말했다. “연인 간의 사랑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야. 가족 간의 사랑도 있고, 강아지와 나의 사랑도 있고...” 아, 그렇구나. 선생님의 몇 가지 예시 중 그나마 초등학생 꼬맹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다섯 가지 정도가 더 있었다. 결국 나머지 빈칸을 다 채우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내가 아는 사랑은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지금도 50가지 사랑을 다 채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그때보단 좀 더 다양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사랑해”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아기를 돌보며 힘들어하는 딸에게 ‘더 자’ 하며 직접 손주를 돌보고, 밥을 차려주는 친정 엄마. 늦은 퇴근길에도 ‘네가 좋아하는 거 사 왔다’며 식탁에 감을 올려두는 친정 아빠. ‘아이를 안아야 할 땐 날 불러’ 하는 남편. 산후 우울증으로 의기소침해 있을 때 ‘언제든 연락해’ 했던 친구들. 그리고 육아하느라 집에만 있는 내게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의 언어들에 기대고 있자면, 아이를 볼 때 느끼는 마음에도 적절한 표현을 골라 붙일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단순히 사랑만으로 설명하기는 아쉬운 마음을 계속 굴려보며 뭐라고 표현할까 고민해 본다. 지금 이름표를 붙이기 위해 기다리는 감정에는 이런 게 있다. 분유를 배부르게 먹고 소리 내 웃는 아이를 볼 때 드는 마음. 그리고 나에게 짜증을 내며, 태어난 지 고작 2개월쯤 됐으면서, 소리치는 아이를 볼 때 드는 마음.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일상이 힘들긴 해도 싫지 않다. 오히려 종종 기쁘게 벅차다. 이 마음을 나는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언어를 데리고 아이가 왔다. 갑자기 등장해서, 세상을 자길 통해 보도록 해놓고 그저 해맑게 웃고 있다. 너는 앞으로 나에게 어떤 문장을 알게 해 줄까. 아이가 알려줄 언어를 다 이해하고 나면 사랑 50가지로 그려보자는 과제 앞에서 빈칸 다 채울 수 있을까. 초보 엄마는 질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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