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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세계 Feb 27. 2023

책상 앞에 앉아 한 생각

'절대 불변하고 완전한 건 없다고, 그런 걸 알려주면 어떨까'

 피부에 닿는 햇살이 많이 따뜻해졌다. 봄이 오나 보다. 아이를 재우고 베란다에서 밀린 빨래를 하는데 기분이 좋았다. ‘이것만 돌려놓고 커피 내려야지. 그리고 책상에서 책 읽어야지!’ 그런데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언제부터 시간 날 때마다 책상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지?’


 오래전부터 결혼을 하면 책상 하나를 반드시 사수하고 싶었다.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가끔 글도 쓰고. 귀여운 아이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할 내 자리 하나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에도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난 결혼하면 내 책상 하나를 꼭 만들 거야. 아무도 마음대로 오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이야.”


 이 꿈에 의구심을 갖게 된 건 한 친구의 질문 때문이었다. “근데 왜 방이나 서재가 아니고 책상이야? 소박하게.” 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시절 가정 시간은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고 늘 조곤조곤 말하는 여자 선생님이 담당이었다. 교탁을 양손으로 짚고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인 그는 학생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도 책상을 하나 꼭 마련하세요. 아이들도, 남편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보고. 알겠죠?”


 당시 내 주변엔 엄마를 포함해 집에 자기 책상을 가진 여성이 없었다. 그때 내가 아는 가장 성공한 여성 작가, 조앤 K 롤링도 식탁에서 해리포터를 썼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마땅한 작업 공간이 없었던 것은 오히려 그를 더 빛나게 만드는, 필수적인 역경처럼 묘사됐다.


 반면 아빠의 서재는 흔히 볼 수 있는 거였다. 주변에도 있었고,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빠나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훔쳐봤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엄마의 서재에서 성장한 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가 스스로를 위해,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니. 나는 가정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래도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는 ‘책상을 확보하라’는 말에 이렇게까지 꽂혀 살 줄 상상도 못 했지만.


 책상을 확보하라는 조언이 정말 소박한가. 사실 먹고살다 보면 주체성을 유지하기 참 어렵다. 한마디로 ‘그냥’ 산다. 그런데 책상을 가지고 나니 좀 다르다. 거기 앉아 멍 때리고 뭔가 생각을 하게 된다. 커피나 마시면서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더라도 그건 누구 엄마로서, 누구 아내로서 하는 생각이 아니다. 온전히 내 생각만 책상 앞에서 한, 두 시간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의 나는 대부분 조금 달라져있다. 스스로에 대해 조금 더 명료해지고, 스스로를 대접하는 기분이 된다. 그리고 책상을 두는 건 서재나 방을 따로 두는 것보다 훨씬 실천하기 쉽다. 그냥 가구 하나만 집 어딘가에 두면 되니까. 소박한 듯 소박하지 않은 가르침을 이제는 이해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반면 예전엔 크게 다가왔으나 이제는 희미해진 어느 생각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역시 고등학생 시절 어느 도덕 시간이었다. 늘 세련되게 옷을 입고 다녔던 여자 선생님이 혼전 순결에 대해 말했다. “여러분이 대학에 가고 어른이 되면, 만나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혼전 순결을 (이때 짓궂은 친구들이 ‘오~~’ 했다.) 지키기 어려운 순간도 올 텐데 꼭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때 사랑을 나누는 것도 난 좋다고 봐요. 내 남편도 나를 지켜준 사람이었거든요. 저는 후회 안 해요.”


 그때 난 선생님을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숫기 없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은 어디엔가 콕 박혀서 스무 살 이후의 나를 꾸준히 통제했다. 갓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은 스킨십을 사랑의 척도처럼 생각하곤 했다. 상대가 자길 얼마나 사랑하느냐며 스킨십을 해올 때마다 나는 갈등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진짜로 사랑하고 있나? 후회는 없을까?’


 그래서 나는 연인이 된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역으로 ‘진짜 사랑’을 확인했다. 상대도 괴로웠겠지만 그건 시험 출제자인 나 역시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 연애는 시작이 조심스러운 것, 끝내기는 너무 어려운 게 됐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다가 헤어지면 안도하거나 자책하거나 분노했다. 진짜 사랑이라 믿었는데 배신당해서. 또는 진짜 사랑이 아니어서.


 우리는 듣고 본 것 안에서 살아간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신념을 이해하거나 버리는 것도 쉬워진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학창 시절 선생님의 말보다 더 많은 말과 글을 통해 ‘결혼’이니, ‘순결’이니 그런 개념을 이해하게 됐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었다. 스킨십이 없어도, 과한 스킨십도, 스킨십이 있다가 없어진 것도, 없다가 생기는 것도 다 사랑의 표현방식이다. 도덕 선생님이 틀린 건 아닌데, 그냥 혼전순결은 사랑에 대한 여러 태도, 혹은 표현 방식 중 하나였단 걸 이제는 안다.




 ‘나의 부족한 말이 누군가의 전부가 되어선 안 될 텐데...’ 아무래도 나를 통해 세상을 볼 아이가 먼저 떠올라 자기 검열을 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꿨다. 어쨌든 아이도 새로운 말과 글을 받아들이며 나의 말을 이해하거나 수정해 가겠지. 우리의 모습과 생각 중에 절대 불변하고 완전한 건 없다고 알려주면 어떨까-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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