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결 Sep 15. 2021

이뻐! 괜찮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나는 유난히 긴치마를 좋아했다. 옷가게를 둘러보면 꼭 비슷한 스타일의 치마가 눈에 들어왔고, 그 옷을 입은 이쁜 내가 상상이 됐다. 어떤 봄엔 고운 자줏빛이 나는 긴 플레어스커트를 샀고 어떤 여름엔 겉이 방사로 되어 샤랄라 느낌이 나는 긴치마를 샀다. 겨울엔 겹겹이 주름진 긴치마를 골랐다.


그렇게 착착 우리 집 옷걸이에 장착한 나의 긴치마들은, 생각보다 쏙쏙 빠져나오지 못하고 옷장에 박혀있는 신세가 되었다. 청바지에 맨투맨티를 즐겨 입던 내 몸과 의식은 어느새 거기에 길들여져 치마를 입는다는 것, 그것도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는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남들이 보면 대부분 '여성스럽네',라고 보는 내 외모와는 달리 나는 남자들만 득실대는 공대를 나왔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남자들이 주를 이룬 곳이다. 내 전공을 들으면 '어? 정말요? 그리 안 보이는데?'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정체성은 그렇게 진짜 내가 가진 것과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 것들이 상반되게 공존하며 이루어졌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을 어쩌면 지금껏 내가 인정하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의견이 대립되는 것이 싫어 이래도 좋아 저래도 좋아하던 성격이, 지금 내가 놓여 있는 환경에서 삐죽 튀어나오지 않는 스타일을 만들었고, 평소엔 무난한 스타일을 추구하며 지내왔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긴치마를 입는 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있는 환경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고, 치렁치렁하면 활동하는데 거추장스럽고, 뭔가 한가하게 노니는 거 같은 느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거다. 입고는 싶어 사긴 했지만 입지는 못하는. 나에게 긴치마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숨기고 싶은 나의 욕구였을까.


오늘 문득, 내가 잠시 비껴있는 나의 환경 툭 내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 넌 지금 자유잖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생각들을 의식해 옷을 가려 입을 필요가 없잖아. 그런 시간도 이제 몇 달 안 남았어. 그러니 입고 싶은 옷을 맘껏 입어보자! 하는 어쩐지 귀여운 결의가 생겨났다. 그래도 한두 번은 입었던 보랏빛 치마를 꺼냈다.


오늘 아이를 데려다주며 자꾸 지나가다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힐끔거렸다. 아, 예쁘잖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 나는 왜 스스로 억눌렀을까? 남은 시간들을 더 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채울 나 자신이 상상된다. 어쩌면 오늘부로 나는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용이야 용이야 용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