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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에 핀 꽃 한송이 Nov 29. 2023

백지 한 장

소소한 일상 에세이

두 살된 아들이 백지를 찾는 일이 종종 있다. 펜에 관심을 가질 때라 바닥이나 벽에 낙서할까 마음을 졸이며 크레파스를 손에 들고 있을 때마다 백지를 내어줬던 덕분이다.

아들은 백지에 그렇다할 형체는 없는 수없이 많은 선을 긋는다. 처음에는 일직선이었다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처럼 축 처지기도 하던 선은 요즘은 갈팡질팡하며 위로 아래로 예측못할 방향으로 뻗는 중이다. 머지 않아 네모나 동그라미같은 가장 기본적인 모양을 만들어낼테다. 백지장에 아들이 그려낼 그림을 못내 기다리는 나로서는 집안 구석구석 이면지나 어떤 종이든 찾아내 아들 앞에 대령하며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본다해도 이처럼 경이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손이 그려내는 것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탄하는 중이다.

내가 백지 한 장에 한가득 그림을 그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은 초등학교 5학년쯤으로 기억된다. 추운 겨울날 도시에 살고 있다는 아빠의 친구가 나와 동갑인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온 날이였다. 아빠와 친구는 엄마가 내어준 한상 가득 요리와 맥주를 마주하고 몇년만의 만남인지라 반가움에 연속 술잔을 비우며 회포를 풀었다. 그 옆 작은 방에서 나도 단발머리의 그 아이와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나와 그 아이의 생에 첫 남자였던 무심한 아빠들은 “둘이 동갑이네? 얼른 방에 들어가 놀아.”하고는 작은 방에 둘을 집어넣고 미닫이문을 드르륵 닫아버렸다. 그 아이는 작은 창문 너머 소리없이 내리는 함박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함박눈에 진심인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게 어색한 것 같기도 해서 “함박눈이네. 진짜 오랜만이다야.” 하고 용기내어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잣말같기도 하고 그 아이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한 애매한 말투에 아이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으므로 멋적은 혼잣말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곶감과 쿠키를 작은 상 위에 올려놓고 아이에게 평소에 뭘 가장 좋아하냐고 물음으로써 지독한 어색함은 마지못해 엄마의 등 뒤로 잠시 몸을 숨겼다.

“그림 그리기요.”

그 대답에 어머어머, 우리 애는 그림 그리기는 영 싫어하는데 하며 엄마는 감탄하듯 박수를 한번 탁 치시더니 창고에 보관만 하고 있었던 크레파스와 하얀 그림 종이를 들고 왔다. 에이포지 한장 크기에 두께가 제법 두꺼웠던 그림종이는 그때만 해도 고급진 것으로 딸이 화가가 될지 가수가 될지 대체 뭐가 될지 기대되고 궁금하고 답답하기도 했던 엄마가 시내에 장보러 갔다 사온 것이였다.

엄마는 그림 종이 두 장을 뜯어 내 나와 그 아이에게 한장씩 나눠주고 그 앞에 크레파스를 세팅해 준 뒤 자리를 뜨면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손님이잖니. 잘해줘.”

엄마가 정의해준 나와 그 아이의 관계 호칭에 그제야 나는 창밖에서 내리는 함박눈처럼 오늘 소리없이 찾아왔다가 홀연히 사라질 그 아이에게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갈피를 잡고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필을 잡았다. 아이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과하게 많은 말을 걸지도 말고 그렇다고 전혀 무관심하게 보이지도 않도록 적절하게 배려하면서 최대한 아이가 편하게 있도록 하는것, 이것은 엄마가 오래전 내게 가르쳐준 처음 보는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였다.

아이도 이내 연필을 잡았다.

사실 나는 그림 그리기에 썩 재주가 없었으므로 크레파스를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긴 시간과 침묵이 싫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림 종이만 쳐다보는 내 옆이 편했던지 점점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 아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편안함이 좋았다.

내 그림은 뻔했다.

세모를 그리고 바로 밑에 이어 네모를 붙이고 네모 안에 또 작은 네모 두 개를 나란히 그려넣음으로써 아무도 살고 싶지 않은 집이 완성됐다. 집 앞에 길을 내고 집 위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그리고 집 마당에 덩그러니 정체모를 나무 두 그루의 형체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네 가족으로 보이는 동그란 얼굴에 활짝 웃는 사람 넷이 등장했다. 성별은 표기해야 할 것 같아 사람 셋에게는 치마를 입히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길게 늘어뜨렸다가 엄마는 파마머리, 나는 단발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아차차, 지우개를 잡으려는 순간 아이와 손끝이 스쳤다. 아이와 나는 얼른 손을 움츠리며 동시에 말했다.

“먼저 써!”

아이도 나도 당황함에 처음으로 서로 눈빛을 부딪쳤다. 각자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하릴없이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늘쩡늘쩡 배회하던 어색함이 호출받아 이내 나와 그 아이 사이에 차렷 자세로 서있었다. 아이 얼굴이 완숙한 자두처럼 빨개졌으므로 나는 이내 손을 뻗어 먼저 지우개를 잡았다.

“고마워! 먼저 쓸게.”

머릿 속이 하얘서 지우개로 사람 머리를 다 지워버리고 나서야 내가 지우고 싶었던 건 긴머리카락이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지우개에 붙은 검은 부스러기를 땀이 난 손바닥에 문질러 깨끗이 없앤 뒤 그 아이 쪽에 가깝게 지우개를 슬쩍 내려놓았다. 그 틈에 아이 그림을 쳐다보니 아이는 종이 한장 가득 바다 속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이 수십종은 있었으므로 나도 몰래 하이톤으로 “우와!” 감탄사를 뿜어내고 말았다. 아이는 움찔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웃으며 “다 그리면 보여줄게.” 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이가 크레파스로 색을 입히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내 그림에 전기줄을 긋고 새도 몇마리 그려놓고 사람 넷의 이목구비를 각자 다르게 수정했다. 언니 얼굴은 못돼보이게 눈꼬리를 마귀처럼 위로 올리고 나무에 나뭇잎을 쉴새없이 더하며 긴 시간을 견디고 버텼다.

“다 그렸다!”

아이가 혼잣말 반, 내게 건네는 말 반 느낌으로 홀가분하게 말할 때 나는 이내 그 말을 받았다.

“나도 다 그렸어. 그림 한번 봐도 돼?”

아이는 망설임 없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내 앞에 그림을 쓱 들이밀었다.

우와…

나도 몰래 감탄을 했고 아이는 그 감탄이 익숙한 듯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세상 절반의 어류는 바다에 살고 있대. 여기서부터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반딧불오징어, 아귀,풍선뱀장어야. 산호초 주변에 사는 동물들이 제일 귀여운 것 같아. 얘는 해마, 얘는 만다린피시야. 만다린피시는 무늬가 예쁘지? 이걸 그리는게 쉽지 않았어.”

아이는 무려 20종에 달하는 바닷속 동물을 바다 깊은 곳부터 땅과 가까운 바닷속, 그리고 바닷가에 사는 것까지 설명해주었다. 나에게 “넌 어떤 물고기를 좋아해?”라고 묻길래 나는 고등어,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용케도 참았다. 내가 알고 있는 물고기는 밥상위에 올라오는 것들이 다였다.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먼저 찾아와 자주 눈에 띄는 것들 말이다. 나무도, 꽃도 그랬다. 내가 먼저 발을 내디뎌서 알아가려고 관심을 가진 대상은 별로 없었다.

아이가 주고 간 잔상은 꽤 컸다. 아이의 탁월한 그림 솜씨가 부러웠던 건 아니였다. 그 아이덕분에 한동안은 “이건 뭐에요” 병에 걸려 내가 모르는 것들을 더 알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혔고 그렇게 내가 알아간 것들중에 관련된 모든 걸 알고 싶을 정도로 내 관심을 끌만한 대상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것이 끝없이 펼쳐진 우주든 한없이 작고 작은 모래알이든,모래알도 “이건 뭐에요?”라고 물으면 모래는 입을 열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원래 높은 산의 화강암 덩어리였는데, 깨져나와 꽤 큰 돌덩어리가 되었다가 산을 타고 비에 씻기면서 부딪치고 갈라지는 중에 점점 작아지다가 지금 바로 니 발밑에 밟히는 모래알이 되었다고, 니 나이에 몇천배, 어쩌면 몇만배 그 이상을 곱하면 바로 내 나이라고, 나조차 내 나이를 기억할 수 없다고. 그래서 나는 모래알을 조심히 손바닥에 올리고 유심히 보게 되었고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모래알에게는 계속 가야 할 길이 있고, 설령 그 자리에만 또 몇십년을 꼼짝않고 있는대도 비와 바람을 맞고 햇살을 매일 누려야했으므로. 나는 계속 무언가를 보며 이름을 불러보고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귀로 잠잠히 들었다. 그림 솜씨는 여전히 서툴지만 이제 나는 나무 한그루를 그려도 그 나무가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젊을 때 심으신 앵두나무인지 학교 운동장에 뿌리박은 70년 수령 아까시나무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며 그렸다.

이듬해 봄, 그 아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안녕,잘 지내니와 같은 평범한 안부 한마디 없이 도착한 종이 한장에는 그 날의 그 아이와 내가 있었다. 아이는 내가 입은 옷, 머리에 꽂은 삔 색깔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때 내가 그린 낙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미닫이문도,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도 솜사탕처럼 계속 쌓이던 함박눈도, 미소 지으며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표정과 내 그림을 그리다 말고 흘깃 아이의 그림을 쳐다보는 호기심 어린 내 표정까지 아이는 그 시간 그 공간을 백지 한장이 넘치도록 명징하고 정성스럽게 박제해넣었다. 나는 그림을 보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보관을 하고 있다가 며칠 뒤에 다시 꺼내보면 그림 속 책상 밑으로 쭉 뻗은 두 다리에 시선이 가게 되고 그 아이가 그린 것은 찰나였을지 몰라도 나는 내 습관과 마주하게 되었다. 또 며칠 뒤 다시 꺼내보다가 크레파스를 잡은 내 오른쪽 손등의 점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다시 한번 내 손등을 쳐다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사진을 찍듯이 사는 사람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 세상이, 그 사람이, 눈을 뜨고 마주한 오늘이 사진 찍듯 셔터 한번 찰칵 눌러서 기억에 남고 충분히 느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림을 그리듯 몇 번을 더 쳐다보고 머리에 새기면서 종이에 옮겨보고 이게 맞나, 다시 종이 속 형체와 눈 앞의 진실을 비교해 보아야 비로소 마음에 도장 찍듯 각인되었다.

살아가는 동안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내 그림은 전시회장에 걸리지 않고 비싼 값에 팔리지 않겠지만 그림을 그릴 때 나는 화가였다.  마음 속에 백지 한장을 품고 살면 그림은 일초안에 찍어내는 사진보다 한없이 느리지만  선명하게 나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삶의 사소한 부스러기 인줄 알았던 그 순간 안에 숨은 보석같은 기쁨과 위안을 느끼게 하고 종종 깨달음을 얻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사람의 작은 몸짓이나 미소, 눈빛 행동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게 되고 우물을 파듯 깊어지는 관계 속에 달디단 물같은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그림 안에서 나의 감정과 기분 느낌이 선명해지고 투명해지며 나는 바닷속 세계만큼 넓고 깊어지는 나만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끝을 모르고 확장되고 깊어지는 마음과 정신세계를 마주한다는 것, 그것도 삶이 주는 선물이자 축복이라는걸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놀라워하며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들 손에도 크레파스를 쥐어주고 백지 한장을 앞에 펼쳐주며, 내 앞에도 백지 한장을 놓으며 나는 아이에게 말한다. 마음껏 그려, 사랑하는만큼, 꿈 꾸는만큼, 살아갈 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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