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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에 핀 꽃 한송이 Nov 23. 2023

검정 양복

소소한 일상 에세이

(1)​

20대인 외사촌 남동생의 부고를 들은 날 밤,  문득 내 옷장 안에 검정 양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삭의 임신부였고 세살 딸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가족들의 배려로 장례식장에 가지는 못했지만 고기 몇 점 같은 남동생과의 작은 기억들이 머릿 속에 스쳐서 며칠 밤을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이젠 삼십대 중반인데 아직도 검정 양복이 없다는 건 그동안 장례식장에 다녀 본 경험이 없다는 뜻과 다름없을테다.

모종의 의미로 내 주위의 어르신들과 지인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일테이니 감사한 마음이 크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동안 단 한번도 내 발이 닿지 않아도 되는 장례식이 없었던걸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됐다.


(2)​

처음 참석한 장례식은 열살 때였다. 농부였던 둘째 삼촌의 자살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젊은 사람이 어쩌다 그랬다나 수군대고 가족들이 곡을 하는 가운데 엄마가 절대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바깥에서 아침에 입은 노랑색 개나리꽃같은 치마 그대로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돌멩이들을 매만지면서 며칠 전에 힘없이 처진 모습으로 할머니 집에 들러 밑반찬 꾸러기를 들고 가던 둘째 삼촌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둘째 삼촌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영화 필름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마지막 두번째 모습, 세번째 모습..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삼촌의 모든 모습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삼촌의 시신이  들려나갈 때도 엄마는 사력을 다해 내게 뛰어와 손으로 내 눈을 막았다. 떨리는 엄마의 손가락 사이로 나는 하얀 천에 덮였지만 삐죽 밖으로 나온 삼촌의 발가락들을 보았다. 그때 시골에서는 관이 따로 없어 화장하는 버스에 실려갔다.

다음날 엄마에게 삼촌의 발가락을 봤다고 했더니 엄마는 어린 아이들이 죽은 사람의 모습이나 몸의 일부를 보면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거나 잠꼬대를  한다면서 지레 걱정을 했다. 장례식에 오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엄마의 후회는 며칠을 내게 닭고기를 고아 먹이고 소탕도 끓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살아 있을 때 한번도 의식하지 못한 둘째 삼촌의 발가락을 본 것에 대해 두려움보다 내 나름대로 좋은 의미로 해석했고, 우주같은 한 존재의 영속적인 부재는 며칠의 고열같은 그리움 끝에 차차 시간에 의해 옅어져간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배워갔다.

(3)​

두번째 장례식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몇 해를 암으로 힘겹게 투병하며 외래 치료를 수없이 반복하던 아버지는 내가 등교한 날 아침  급격히 위중해져 앰블런스에 실려갔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질척질척 쏟아지던 우중충한 날이었는데 칠판에 한가득 적힌 수학 방정식을 보며 눈이 가물가물 감길 때쯤 교실 문을 누군가가 급박하게 노크했고, 선생님의 호명에 놀란 내가 후다닥 일어나 나가보니 일년에 한 두번 얼굴을 볼까말까한 먼 친척 어르신이었다.

"아버지가 위중하시다."

그 한마디를 듣고 친척 분이 학교 앞에 대기해놓은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해보니 이미 아버지의 침대 주위로 친척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둘째 딸이 왔어. 다들 물러서라고."

덩치 큰 친척분이 우악스레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내 손을 끌고 들어가 아버지 앞에 나를 세웠다.

"어이, 길이! 정신 차리라구! 둘째 딸이 보러 왔어!"

흐느끼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 가운데 이미 눈동자는 초점없이 허공을 향한 채 가까스로 그 다음 숨을 내쉬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 손이라도 잡아줘."

"정신 차리라고 말해봐."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한창 예민한 사춘기였다. 끝까지 벙쪄있다가 아버지의 눈이 완전히 감길 때쯤 사람들에 의해 다시 밀려나고 통곡소리를 들으며 옆 의자에 기운없이 앉아있었다.

나는 끝까지 울지 못했다. 친척들의 손에 이끌려 장례식장에 가고, 눈물에 젖은 축축한 손들이 내 손을 잡으며 돈을 건네기도 하고  "이 불쌍한 것아~이제 어떡하니" 하며 와락 안아주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그날 종일 축축하게 내리던 비와 아버지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이었다.

어른이 된 이후도 그날의 소화하기 어려웠던 덩어리 기억을 고통 속에 꺼내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쉽도록 끊임없이 분쇄하는 작업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드라마 속 죽음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하얀 상복을 이미 입고 우아하게 누워있는 어르신 옆에 자식들이 차분하게 둘러서서 유언을 듣는 모습이나, 연인의 품에 안겨 벚꽃잎이 아름답게 휘날리는 가운데 평안하게 눈을 감는 여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웅장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상황들은, 친척들로 시끌벅적한 현장에서 슈퍼맨이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가여운 한 인간으로 마주해야 하는 사춘기 소녀의 얼어붙은 감정과 어떤 식으로든 공동분모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오랜 기간 그날의 장면을 되새김질하며 그것이 곧 인간이 살아가는 리얼리티, 날 것 그대로의 삶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를 둘러싼 어른들의 모습은 그들 방식으로  마지막을  배웅하고자 했던 성의와 예의였고, 떠밀려 내가 맞닥뜨린 그 순간은 언제 어떻게 예기치 못하게 마주할 수도 있는 삶의 무수한 장면 속 하나일 수도 있으며, 어느 누구의 마지막이든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다는 사실을, 그 상대가 설령 내 아버지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4)​

그 이후로 몇 번의 지인의 부고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고 때는 엄마가  오지 말라고 기어코 말려서  학교 수업 내내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봤었고, 막내 삼촌과 존경하던 대학교 교수님의 사고사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물리적으로 멀었던 거리 때문에 장례식에  갈 수가 없었다.

기억나는 마지막 장례식은 첫사랑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때도 엄마는 네가 무슨 며느리라도 되느냐고 한사코 말렸지만 나는 모른척 할수가 없었다. 끼니를 몇 끼 거른 채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첫사랑 옆에서 손님 대접용으로 나온 국에 밥을 말아 자꾸 입에 넣어줬다.

"야, 먹어, 한 입만 더 먹어봐. 힘이 나야 또 울 수 있어. 원래 엄청 슬픈 날은 먹으면서 우는거야." 첫사랑이 꾸역꾸역 국밥을 받아 먹으면서 우는데 나도 옆에서 밥을 국에 말다말고 같이 울었다. 첫사랑 집에 몇 번 놀러가서 아버님과 함께 김밥도 말아먹고 화투를 쳤던 소소한 기억들이  뭐 별거일까 싶었는데 죽음 앞에선 그것마저 슬픔이 되고 추억이 되더라고.

(5)​

어른이 되어보니 가족들은 모두 대도시, 국경을 넘어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는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에 친인척과 사돈까지  오구구 모여들어  당황스러웠던 그젯날이 그리워질 정도다. 직접 갈 수가 없어 마음 담아 부의금만 보내도 이해해야만 하는 썰렁한 장례식들이 아무렇지 않아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부고를 들으면 며칠은 그 사람과의 기억들을 모조리 끄집어내게 되는 건 둘째 삼촌 때부터 굳어진 습관이었다. 그래서 많은 기억을 가진 사람일수록 마음이 더 무겁고, 그 무게를 덜어내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아버지의 부재가 그랬다. 아버지가 떠난 후 한달 뒤에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한번씩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마음의 땜이 툭 터지면서 눈물이 흘렀다. 기억나는 추억은 어찌나 많은지 아무 때든 예고없이 찾아와 상념에 젖을 때가 꽤 있었다. 딸이니까, 그 누구보다 오래오래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건 함께 걷지 못하게 된 무수한 날들에 아쉬움을 담아 기리는 의식같은 것이다.

(6)​

쉬이 잠들 수 없는 밤, 장례식 자리에 직접 갔든 못 갔든 이제 볼 수 없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리다 혼자 중얼거렸다. 조만간 검정 양복을 하나 장만해서 옷장 제일 안쪽에 정갈하게 걸어놓아야겠다고.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농도는 짙어진다고 한다.  어쩌면 더 자주, 느닷없이 마주쳐야 하는 누군가의 부고를 감내해야 하는 것도 삶의 농도가 짙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일테다.

검정 양복이 옷장에 걸려 있다면 나는 평범한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그 양복을 걸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하고 감사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 한번, 죽음을 생각하는 건  좋은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서로에게 다양한 빛깔의 감정을 느끼며 살겠지만 고인에게는 무채색의 감정만 느낀다고 한다. 이를테면 고까운 마음, 괘씸한 마음, 섭섭한 마음같은 것들마저 다양한 빛깔의 감정 영역인 반면 그리운 마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 애틋한 마음은 상대가 명을 달리하는 순간 무채색의 감정 영역이 된다. 오늘 만난 살아있는 사람에게 무채색의 감정을 느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실수를 덜 하게 되고, 따뜻함을 더 많이 건넬지도 모른다.

그리고 옷장에 걸려있는 검정 양복이 어느날 필요할 일이 생긴다면, 할 수 있는 한 지체하지 않고 장례식장에 달려가야겠다. 아직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낸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 서툴다. 그래서 더 장례식장에 뛰어가는 일을 지체하지 않겠다. 정히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묵묵히 같이 울어주면 된다.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면 된다. 슬픔의 자리에 좀 더 오래 머물러 있으면 된다.

이런 이유로 잠 못 드는 밤, 문득 검정 양복을 생각했다.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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