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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2016)

만약에 내가 제니였다면.

by 안진

2018년 12월 27일 씀.


개봉 당시 시간대에 맞는 가까운 상영관이 없어 놓쳤던 영화였는데 우연히 생각나 1년도 더 지난 오늘 보게 되었다. 글을 읽는 건 굉장히 좋아하지만 쓰는 건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영화를 보면서 반드시 내가 느꼈던 감정을 글로 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두서없는 글이 되겠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기분을 꼭 기록해두고 싶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언노운 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엔딩 크레딧에도) 배경음악이 없다. 음악 하나 없이 주인공 제니만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분위기가 고조되고 가라앉는다. 방에서 혼자 노트북으로 보지 않고 영화관에서 봤다면 처음엔 다소 지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영화가 조용하기 때문에. 배경음악이 없다는 것은 주변의 소리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주변의 소리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병원 입구의 벨소리와 주인공의 전화 벨소리다. 사망한 아이가 병원 벨을 누르는 것을 자신이 무시했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그 뒤로 벨이 누르면 다소 긴장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준다. 심지어 무례한 태도로 주치의를 바꾸겠다는 환자에게서 걸려온 야밤의 전화도 받고 바로 달려간다. 주인공의 죄책감은 사고 이후 영화의 모든 장면에 영향을 끼친다. 흔히 '의사'라는 직업이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달리 노인과 저소득층 등 의료보험의 도움을 받는 환자들만 진료하며 바쁜 일과를 보내는 주인공은 혹시나 또 다른 죽음이 찾아올까 봐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도, 겨우 숨을 돌리려고 할 때도 긴장을 풀지 못한 채 환자에게 달려간다.


주인공은 환자들에게 가끔 웃어줄 때를 제외하고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남성들이 주인공을 위협할 때도 다소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서지만 큰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살짝 뚱한 무표정을 유지한다. 다른 영화처럼 주인공의 주변 인물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병원에 찾아오거나 직접 집으로 방문해 진료하는 환자들만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3개월간 임시직으로 수익이 별로 없는 클리닉에서 일했고 25명 중 한 명만이 채용되는 대형 병원에서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려고 했던 주인공은, 진료 마감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났으니 벨을 누르는 사람을 무시하라는 주인공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하는 게 우스울 만큼 평범한 의사인 주인공은 자신이 벨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하나 때문에 마을을 바삐 돌아다니며 사망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만나게 된 사망한 사람과 관련된 인물들은 주인공에게 자신들의 감정을 뱉어내고, 담담하게 듣고 있는 주인공으로부터 자신들의 추악함을 보게 된다. 그들은 공허한 주인공의 눈 속에서 무엇을 봤을까? 사고의 가장 큰 원인제공자인 브라이언의 아빠는 주인공에게 왜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며 윽박지르고 위협했을까?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 속에 부끄러움을 숨기고 사는데 타인이 그걸 보게 허락하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의 아빠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애꿎은 제니에게 분노로 표출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인공은 놀라울 만큼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폭력을 동반한 위협에도 살짝 주춤할 뿐 어떠한 반격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사망한 사람을 알고 있냐고 물어볼 때도 마치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처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모든 증상을) 말해달라고 한다. 영화는 누군가의 일상을 그대로 담는 다큐멘터리처럼 찬찬히 흘러간다. 제니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저 제니가 어떤 마음으로 사망한 아이의 이름을 찾는지 추측할 뿐이다.


한 해의 마지막. 늦은 시각까지 보던 영화가 끝나고 아무런 음악 없이 내려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 슬프지도 않았는데 왜 눈물이 났을까? 그 눈물이 바로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언노운 걸'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내가 흘렸던 눈물이 사건 이후 바뀐 제니의 모습처럼 나를 바꾸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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