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우주 속에서 내가 가진 모든 의미를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줄여서 에에올)를 엄마가 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구하려 하고 마침내 이해하는 가족주의 영화로 보지 않고, 아주 사소한 하지만 거대한 어긋남에서 시작된 삶의 혼란이 어떻게 다시 평온을 찾을 수 있을지 알아가는 영화로 보았다. 내 글은 이러한 감상에서 시작했음을 먼저 알린다.
요즘 '포스트 모더니즘과 철학'이라는 수업에서 모든 것이 다 같고, 중요성의 차이가 사라지고, 마침내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릴 때 어떻게 우리는 그 속에서 견딜지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은 무엇을 향해 존재하는 걸까? 나의 대화, 몸짓, 웃음, 침묵 이 모든 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에서 이미 구성된 의미를 가진다면 내가 태어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경험을 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과정인 걸까?
이런 허무에 빠질 때면, 물음에서 끝나지 않고 나의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다 사라지는 짧은 순간들도 있다. 우리는 피를 잔뜩 흘리거나 장기를 다치거나 잘못된 걸 먹기만 해도 죽어 존재가 사라질 텐데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사는 걸까. 노력하지 않으면 왜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매일 나와 너무도 달라서 이해하기 힘든 타인을 마주하고 살아야 할까. 일개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짧게 잠을 자며 일해야 할 때 일하고 집 지어야 할 때 집을 짓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게 살아가는 걸까.
인간들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안의 작은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되어도 여전히 비합리적인 것을 믿고, 거대한 서사들이 붕괴되어도 무언가의 구조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인류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인류는 수많은 과거를 연구하고, 우리를 여기로 인도한 역사를 분석하지만 여전히 아주 괜찮은 선택은 내리지 못한 채 잘못된 일만 반복하는데 그렇다면 존재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이 해결되지 못하는 질문으로 가득 차는 순간 나의 마음에도 검은 베이글이 생겨난다.
그러나 가끔 즐거운 순간도 있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겁다. 이런 우연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너를 만나 참 다행이다. 우리는 어떻게 만났을까. 너는 너무나도 나와 닮았고 다른 점 마저 즐겁다니. 아무런 이유 없이 실존에 의문을 던진 것처럼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실존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위태로운 순간들에서 삶의 이유가 갑작스럽게 떠올라 그렇게 또 살아간다.
실제로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Everything means something."이라는 말을 만들어내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아마도 "Everything matters."가 더 나은 표현이겠다.) 나는 매 순간 누군가를 만나, 어떤 일을 겪어, 무언가를 만져 변형된다. 내 삶의 무언가는 나를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만들지만 내 삶의 또 다른 무언가는 나를 우주보다도 거대한 존재로 만든다.
나는 종종 내 안의 이상한 과거를 발견할 때마다 갈기갈기 찢고 다 분쇄시켜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들은 또 그것대로 영원히 나의 일부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무언가의 가치는 내가 부여하기에 달렸다는 것은 거대한 부담인 동시에 영원한 자유가 된다. 단순히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에는 다음이 있기에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고, 좋든 나쁘든 나의 선택은 그대로 내 안에 머문다. 나는 무언가를 겪었기 때문에 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나의 경험이 내 안에 자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법을 익힐 때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끝을 맺고 사라지는 것은 없고 언제나 무언가로서 의미하고, 존재한다.
앞서 얘기했던 수업에서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를 공부하며, 우리는 나를 넘어서는 것을 마주할 때 우울과 후회에 빠지지만, 나의 인식능력의 힘을 발견하고 존재의 증가를 발견할 때 환희에 빠지며 삶은 모험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삶에서 때로 전체로서 통합되지 않는 무언가를, 통제되지 않아 불쑥 나타나는 것들을 만난다. 우리가 가진 차이에 대한 섬세한 감각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완고한 의지는, 어쩌면 영화에서 표현된 것처럼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 행위와 감정과 언어 이상으로 우리에게 거대한 것을 준다. 사랑은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내 경험을 뛰어넘고, 균열을 인지했음에도 용케 끌어안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말하기보다 불안 속에서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우주의 진리에, 인간의 마음에, 지구의 신비함에 조금 다가가 무언가를 알게 된 우리는 앎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 시도하고 마침내 '이해'했을 때 그것은 이성으로 이해한 것 이상이 된다.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것은 돈도 업적도 성공도 아닌 그러한 손 내밂이다. 사랑은 타인과 가능한 것만이 아니기에, 내 안의 전쟁을 멈출 수도 있다. 사랑은 위안이 되고 용서가 되고 잠깐의 숨돌림이 된다. 난 아직도 포스트 모던이 뭔지 모르겠지만, 보편을 잃어버렸어도 차이에 대한 경이로움은, 그것들에 대한 사랑은 보편이 사라진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의 중심이 됨을 이해한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모든 것에는 의미가 없으니 그냥 살아가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영화에서 들은 이야기는 교환 가치를 갖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관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누구나 삶에서 이런저런 전쟁을 겪고 있고, 항상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불안은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일을 피해 다른 일을 했을 때 나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고, 지금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몇 년 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잊히기도 하며,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금세 사라져 나를 혼자로 만들 수도 있다. 괜찮다. 언제나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상실과 두려움과 흔들림과 파열은 모두 뒤엉켜 내 안에서 그 모습 그대로, 또는 희미한 모습으로, 또는 정리된 모습으로 그렇게 남는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곳에 있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들이 한 번에 일어날지라도 결국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있다. 내가 겪은 시련과 아픔이, 기쁨과 찬란함이 그대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들이 여기에 있다.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battle you know nothing about it. Be Kind. Always." -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출처를 모를 사진에서.
덧. 글을 쓰면서 자주 마무리를 다정과 사랑과 이해로 맺는 것 같아 난감하긴 하지만 그게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어쩔 수 없다. / 글을 읽으면서 고민되는 지점들을 검색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책, <윤리적 폭력 비판>의 인용구를 수도 없이 봤다. 당신을 수많은 책을 제치고 종강하면 가장 먼저 읽을 책으로 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