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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5. 2023

꿀벌 매뉴얼_엄마가 사라졌어요

위기 탈출 플랜 비

순차적으로 2층 집을 올렸다. 2층집 생활은 뿌듯했다. 비록 곳간 대부분은 비었고, 실속은 부족했으나, 꿀벌들과 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해. 우리 봉순이들이 대견했다. 일억 년 전 사냥을 그만두고,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봉순이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꿀벌은 매일 태어났고, 신참 외역벌들은 벌통 앞에서 기억 비행을 했다. 일교차가 적어지고, 꿀벌들이 동생 벌들을 보살피기 좋은 날씨가 되었다. 꿀벌들이 세상에 나가 꽃꿀과 꽃가루를 쉼 없이 채취해 왔다. 이것들이 세상의 유한한 자원이라 하더라도 세상에 무해한 기분을 느꼈다. 


이즈음, 말벌 여왕벌이 나타났다. 장수말벌과 등검은말벌이었다. 덩치가 보통보다 컸다. 날개소리도 더 컸는데, 몇 번을 지나쳐 보았다. 이들이 여왕벌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장수말벌 여왕벌은 정말 컸다. 핸드폰 진동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 매너모드 아닌 매너모드로 날아 지나갔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여왕벌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전까지, 첫 번째 일벌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스스로 먹이를 찾고, 집을 짓는다. 적당한 터를 잡고,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애벌레를 돌보는 동안 먹이를 찾으러 나온 것이다. 이를 알았더라면, 진즉 말벌 트랩을 설치해 놓았을 텐데. 여왕벌을 잡는다는 것은 말벌 무리 하나를 잡는다는 뜻이다. 여왕벌이 앞으로 헤쳐갈 나름의 긴 여정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자연은 그런 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을날 벌통 곁을 떠나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더라면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텃밭에는 이런 복선거리가 많다.

 

꿀벌 여왕벌은 벌통 안에서 가장 보호를 받는 존재다. 여왕벌은 알만 낳을 수 있도록 시녀벌들이 먹이를 주고, 몸단장을 해준다. 꿀벌 사회의 재생산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생식 능력을 잃은 무리는 점차 소멸한다. 따라서  여왕벌은 끝까지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꿀벌 사회도 생명체 집단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여왕벌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똑똑하게도 집단내 여왕벌이 사라졌을 경우의 절차가 꿀벌의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다. 양봉가들은 이를 관찰하고 이해하였고, 꿀벌 무리의 생기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인간과 함께 사는 꿀벌 무리에서 여왕벌이 사라지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다. 양봉가가 내검을 하다 실수하는 경우. 혹은 여왕벌이 약해져 산란 능력이 떨어졌을 경우. 수만 마리가 살아가는 꿀벌들이 여왕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왕벌만이 갖고 있는 페로몬이 사라진다. 자신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결속시켜 주던 냄새가 없어지는 것은 여왕벌이 없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꿀벌들은 비상 절차를 발동한다. 한 치의 오차가 없는 꿀벌들의 절차는 경이롭다.


여왕벌과 일벌 사이에 유전자 차이가 없다는 점이 이 공동체가 맞이한 위기를 넘을 힘이 된다. 수벌 알을 제외하고는 모든 알이 여왕벌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 여왕벌은 추울 때와 아주 더울 때를 빼고는 계속해서 알을 낳는다. 따라서 여왕벌이 사라졌더라도, 여왕벌은 사라지기 전까지 공동체에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여왕벌이 사라졌다는 걸 인지한 순간 꿀벌들은 즉시 가장 최근에 낳은 알들을 찾는다. 그중에 나름의 선별 기준에 따라 여왕으로 추대할 알들을 정한다. 그리고 이 알이 있는 방들을 개조한다. 


분봉을 위해 만들어진 여왕의 육아방은 자연왕대라 불리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방은 변성왕대라고 부른다. 왕대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획 출산은 넉넉한 위치에 알을 낳는다. 비상 상황에서는 이미 낳은 알을 왕대로 만들기 때문에 아이스크림 콘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 곧은 원뿔 모양이어야 하는데, 꾸부정한 원통 모양이다. 따라서 양봉가들은 변성 왕대에서 태어난 여왕도 부실할 것이라 여긴다. 꿀벌들이 어떤 기준으로 여왕벌이 될 알을 정하는지 아직 밝혀지진 않았다. 변성왕대가 생겼다는 것은 벌통 안에 여왕벌이 없다는 신호다. 


벌통 안에 여왕벌이 없어진 것도 모르다니, 너무 무심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여왕벌 등에 마킹(색칠)하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덩치가 두 배나 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하지만 벌통이 이층 집이 되고(매번 내렸다 올렸다 해야 한다) 벌통 안에 벌집(소비)이 열 장이나 되고 보니, 내검하는 것이 대단한 노동이 되었다. 꿀벌 수만 마리 중에 여왕벌 찾는 게 힘든 일이 되었다. 전업으로 하는 분들은 수십 통을 살펴야 하니 어려울 것 같다.


벌통 안에 변성왕대가 발생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거나, 사고가 생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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