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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Mar 14. 2022

질문 3_돼지와 정이 들지는 않았나요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후기 중에는, 책 제목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 '채식주의'가 주요하게 나올 거라 믿었는데, 채식에 대한 이야기는 프롤로그에서 감질나게 지나간다는 것이다. 믿던 제목에 발등 찍힌 격이라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전통적 전개를 바란 독자들도 계시다. 못된 늑대가 돼지 삼 남매에게 감화되어, "너희를 잡아먹으려 했던 나를 용서하렴(무릎을 꿇는다) 우리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자꾸나."라는 회심의 이야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런 후기를 보면 책을 세상에 내보내던 즈음이 생각난다. 


책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몇몇 곳에서 연락이 왔다. 그중 방송국도 있었다. "KBS 환경스페셜 팀인데요." (인간극장 팀에게 죄송하지만) 인간극장에서 연락이 왔을 때는 가문의 영광 수준으로 생각했는데, 환경스페셜은 마음이 황송할 지경이었다. 무려 환경스페셜이라니. 작가님은 동물복지에 관한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중에서도 돼지. 시나리오상 대안적인 축산현장을 찾고 있던 중에 책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허지만 그때는 이미 돼지들이 세상에 없던 때였다. 돼지들이 있던 자리는 이제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어.. 하지만 돼지가 없는데요." 


"아, 그런가요.. 하지만 한번 찾아봬도 될까요?"

'돼지 없는' 채식주의자는 앙꼬 없는 호빵일 텐데, 이분들은 돼지 없는 나를 왜? 방송국이라면 정신없이 바쁘신 분들 아니던가. 야근하기도 바쁘지 않을까. 그런데, 이분들 나를 언제 봤다고 여기까지 오겠다는 건가. 왜 이렇게 적극적일까. 이상하다. 가만, 혹시 돼지를 잡아먹은 것에 분노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현피(혼쭐 내러) 오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내심 방송국에 일하는 분들의 면면이 궁금하였다. 


어느 목요일 점심, 피디라는 분과 조연출이라는 분까지 세 분이 왔다. 도착 직전, 먼저 연락했던 작가님은 다른 일이 생겨 못 온다는 연락이 왔다. 사소하지만 약속이 갑자기 변경되고 보니 호기심 뒤에 서있던 의심이 다시 손을 들었다. "이거 봐 C발. 이것들 현피야. 확실해!" 솔직히 가슴이 조금 쫄렸다. 나는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고 이분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먼저 보기로 했다. 모든 걸 먼저 말하지 않으리라. 


그래도 예를 다해 먼길 오신 분들께 우리 동네의 자랑, 야채 김밥과 라면을 대접했다. 도시에선 그 비싸다는 루꼴라가 옆구리 터지게 들어간 김밥이었다. 그리고 라면 면보다 많이 들어간 숙주나물에 이분들은 조금 과한 감동을 받았다. '루꼴라에 감동하다니 이 촌놈들...' 나는 후식 빵으로 이에 화답했다. 


우리는 빵집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신변의 잡기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래도 나는 이분들의 목적을 상기시켜드리기 위해 목장 현장에 대해 말했다. (이분들이 받는 수신료는 우리가 낸 세금 아니던가. 일합시다) 이분들은 환경스페셜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이분들의 방문은 서로가 좋은 사람임은 확인하는 자리였달까.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달까. 이분들... 그냥 취재 핑계로 나들이를 오신 게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분들 명함을 받지 않은 탓에 진짜 환경스페셜 팀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는 것. 오늘은 진짜 현피를 위한 사전답사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남는다.


아냐, 사무실에서 루꼴라를 키운다는 분들이 나쁜 사람들 일리 없을 거야...

무튼 쫄보인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조금 떨렸다. 


돼지와 정이 들진 않았나요?


북 토크를 하는 경우에도 이런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글에도 기술했듯, 나는 돼지들과 '정서적 교감'을 갖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돼지가 영리한 동물이라는 것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렇다면 '개는 왜 안돼?'라는 반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돼지를 잡았다. 책임을 다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어렴풋하고 애매한 정리였다. 책 출간 후 다시금 기회가 주어져 이 질문에 대해 다시 정리해보게 되었다. 


정서적 교감은 반려동물로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반려 관계는 삶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내가 돼지에게 했던 행위는 단순한 돌봄이었다. 물론 이 돌봄은 관행 축산에서 행해지는 상품의 생산과정은 아니었다. 나는 세 마리 돼지를 개별의 생명으로 여겼다. 최선을 다해 돼지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것은 반려 관계는 아니었다. 다른 강아지가 우리 집 멍멍이 '알로'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반려 관계다. 책에 나오는 돼지 삼 남매가 어떤 돼지로도 대체 불가능한 돼지가 아니었다. 물론 시간을 조금 더 가졌으면 그렇게 됐을 수도 있다.


생명감수성과 정서적 친밀감은 다르다.

동물의 인격화로 인해 빠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도시에서 자란 탓일 수도 있고, 생명도 상품으로 거래하는 세상에서 밖에 살아보지 못한 나의 한계일지 모른다. 우리는 먹거리 생산지와 멀어졌다. 흙을 볼일 없고, 동물을 볼 필요가 없다. 마트에서 식품을 보는 탓에 매대의 뒷모습을 알지 못한다. 노동과 환경을. 분절된 생활이라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나를 단순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세상은 먹어선 안 되는 동물과 먹어도 되는 동물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물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은 동물과 인간의 풍부한 관계 모두를 설명하지 못한다.


동물을 '가축'으로써 길렀던 시대는 동물을 영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어느 문화는 동물을 먹으면, 인간은 동물의 영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문화는 동물을 인간이 환생한 존재라 생각했고, 가족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현재도 국가를 이루지 않고 사는 인류의 모습을 관찰하면, 그들은 동물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 살을 취한다고 한다.


돼지의 존재에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써 그 살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육식주의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거 윤리적 소비가 아닌 어떤 새로운 관계로 가능한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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