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니, 그때 워홀 안 가길 잘했지
인천 공항에서 시드니까지 약 10시간. 밤 비행이라 한숨 자고 일어나니 이미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핸드폰으로 한국에 계신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봤다. 당연히 No connecting 이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2015년, 대학교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취업 난관에 부딪혔을 때 Plan B로 알아보던 호주 워홀. 다행스럽게도 원하던 회사에 입사해서 워홀은 잠시 미뤄놨었다.
2018년, 신입 2년 차 시절. 악마 같았던 사수 때문에 조직 생활에 두려움과 회의감을 느끼고 퇴직 서류에 사인까지 했던 때. 감사하게도, 좋게 봐주신 팀장님 덕분에 퇴사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사에 남아있게 됐다. 퇴사를 준비할 때 대학원과 워홀을 고민했었던 게 생각났다.
2022년, 대리 3년 차. 한창 워커홀릭으로 평일 주말 없이 일에만 몰두하던 시기. 속해 있던 조직에서 최우수 고과(S)를 받았고 이듬해 3월 Professional로 승진 연차보다 1년 먼저 승진을 했다.
일에만 매진하며 열심히 달려왔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 쉼과 함께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직 혹은 워홀을 고민했다. 생일이 12월이라, 호주 워홀은 내게 있어 마지막 기회였기에 정말 신중히 고민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워홀은 항상 나에게 Plan B였었구나)
이런 고민들을 하던 나에게 호주 주재원 오퍼가 들어온 것이다!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정말 모른다. 순간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잠언 16:9)“
워홀을 통해서 좋은 만남과 경험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금방 포기하고 돌아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내 커리어와 상관없는 다른 일들을 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현타도 많이 왔을 거다.
하지만 주재원으로 파견받으니 집, 차, 보험 모두 지원이 나왔다. 월급도 (현지에 비해 높진 않지만..)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받았다. 커리어도 이어갈 수 있고 심지어 글로벌 경험을 통해 업무 역량을 키우고 개발할 수 있다. 이런 기회를 준 회사에 너무 감사했고 그만큼 열심히 해야지라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시드니 도착 당일, 이미 법인에서 3년 차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선배와 점심 약속을 잡았다.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가서 짐을 풀고 1층으로 내려가니 선배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던 선배라 살짝 긴장했지만, 이미 회사에서 일 잘하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소문난 인재였기 때문에 오늘의 만남이 너무 기대됐다.
선배가 사준 호주식 브런치를 먹고 함께 Coles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했다. 인사하고 집에 가려는데 선배가 가방 하나를 건넸다. 호주에 살면서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호주용 문어발(콘센트), 핸드폰 유심, 벌레퇴치제 등 미처 준비 못한 물건들이었다. 정말 큰 감동이었다. 이런 따스함 속에서 잘 정착하고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드니를 느끼고 누리고 즐길 새도 없이 한 달도 안 되어 향수병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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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직장인 7년 차, 호주 주재원으로 발령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