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바일지 4] 베스킨라빈스 알바생
어리버리했던 고3은 여전히 어리버리한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 하이에나 같은 시선은 늘 알바 공고를 향해 있었는데, 어찌되었든 용돈 정도는 혼자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학교 바로 앞 베스킨라빈스에서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학교도 가깝고, 시간표만 잘 짜면 공강이나 쉬는 날에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첨!
처음에 들어가서는 연습생 기간을 거치게 되는데, 아이스크림 푸는 것부터 음료를 제작하는 것까지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베스킨라빈스 하면 아이스크림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은근히 얼음을 넣고 간 음료나 커피 메뉴도 있어서 복잡하다. 물론 만드는 법이 ‘비법 레시피’처럼 붙여져 있기 때문에 그대로 하면 되지만, 사람이 많이 몰려 바쁠땐 초조해진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건 아이스크림을 푸는 일 아니겠는가. 그게 또 만만치 않다. 한 때 유명했던 짤(?) 중에 ‘키 작은 사람은 베스킨라빈스 알바 하지 마라’는 글도 있었다. 요지는 이렇다. 키가 작으면 아이스크림을 퍼기 위해 거의 냉동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다리가 달랑 달랑 들리는 수준)
나는 키 158cm에 당시엔 꽤 마른 체형이었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푸는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했다. 매장 뒤쪽 커다란 냉동고엔 동그랗고 커다란 통에 새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다. 갓 들어온 아이스크림은 정말 ‘꽁꽁’ 얼어 있어서 퍼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보통 통의 밑바닥이 보일 때쯤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미리 꺼내서 살짝 녹인다.
파인트나 하프갤론은 커다란 주걱으로 푸니까 그나마 쉬웠다. 문제는 싱글 레귤러 같은 동그란 스쿱으로 떠야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바닐라나 셔벗 같은 건 괜찮은데, 안에 초코볼이나 치즈 같은 게 들어간 건 스쿱이 턱턱 걸려 예쁘고 동그랗게 푸는 게 어려웠다.
그날의 재앙은 그런 와중에 찾아왔다.
일한 지 한두 달쯤 되었을 때였다. 완전 초짜는 아니지만 베테랑도 아니던, 어중이떠중이 중 어중이이거나 떠중이였던 시절이었다. 보통 2인 1조로 일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혼자였다. 조금 한가해져서 멍 때리고 있는데, 딸랑 하고 문이 열렸다.
헉!
시커먼 운동복 입은 체대생 아홉 명이 우르르 들어오는 거였다. 아무래도 여럿이 오면 파인트 몇 개나 하프갤론 하나 사서 나눠 먹는 게 국룰 아니겠는가. 속으로 하프갤론! 하프갤론!을 외치고 있는 그 때, 체대생들이 하는 말!
“엄마는 외계인 콘으로 9개 주세요.”
으악! '엄마는 외계인'을 먹어본 사람은 안다. 초코 아이스크림에 동그란 초코볼이 박혀 있어서 스쿱으로 뜨기 난이도 최상급. 게다가 지금 내가 퍼야할 ‘엄마는 외계인’은 갓 꺼내서 딱딱하기까지 했다. 지금 같으면 ‘학생, 여럿이 있으면 하프갤론을 시켜서 나눠먹는게 이득일세’하고 추천했겠지만, 그땐 유도리랄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어쩌겠는가. 오더는 내려졌고, 냉동고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나는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아이스크림을 푸기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았다. 내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내 것도 아니니까 이왕이면 많이 주자’. 적어도 정량 이하로 준 적은 없었다. 가능하면 동그랗고 크게 퍼려고 노력했으니까.
처음 서너개는 괜찮았다. 대여섯개까지도 근근이 푼거 같다. (오호라, 나란 녀석 제법 익숙해졌는데? 하면 잠시 뿌듯했더랬지)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팔 힘이 급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원래 아이스크림은 겉보다 속이 더 딱딱한 법이다. 말랑하게 녹아있던 표면 부분이 끝나자, 꽝꽝 얼어있는 부분이 등장했다. 초코볼은 턱턱 걸리지, 손아귀는 저리지, 건실한 청년 9명의 눈동자는 내 손끝만 보지. 거의 울기 직전...
첫 번째 콘과 마지막 콘 크기가 거짓말 팍팍 보태서 2배는 차이 났다. 더 많이 주고 싶은데.. 더 크게 푸고 싶은데.. 스쿱에서 아이스크림이 자꾸 이탈하며 굴러갔다. 분명히 누가 봐도 크기 차이가 있었는데, 착한 체대생들은 불평 한 마디도 없이 받아갔다. 진짜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 나는 눈물 날 뻔했다. 진심으로.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나 같이 심약한 쫄보가 버텨내기는 버거운 시간들이었지. 혹시 그 때 그 체대생 중 덜덜 떨면서 아이스크림을 퍼던 초짜 알바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 때 양이 적어서 죄송했습니다!
- 베스킨라빈스에서 일하면서 기억에 남았던 재미있는 단상들
1. (지금은 모르겠지만) 2003~2004년 시절, 매장 안에서 아이스크림 떨어뜨리면? → 같은 걸로 다시 퍼서 줬다. 콘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순간, 툭 하고 떨어지는 경우말이다.
2. 동료 알바한테는 꽉꽉 담아주는 게 국룰 → 어찌나 많이 담았던지, 집에 가서 보면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산처럼 쌓아올린 아이스크림을 힘으로 눌러서 뚜껑을 닫았더랬지.
3. 맛보기 스푼의 은밀한 용도 → 베스킨라빈스에는 맛보기를 할 수 있는 작디작은 스푼이 있다. 손님용이지만 사실 알바들의 간식이자 몰래 먹기 스킬용. 작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더 크고 더 동그란 크기로 푸는 법을 연습하곤 했다.
4. 역대급 참사 → 같이 일하던 동생이 퇴근하며 저장 냉동고 전원을 꺼버린 사건! 그일로 아침에 매장 아이스크림 반 이상이 녹아버린 대참사가 일어났다. 결국 동생이 20만원쯤 물어냈고,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 10여 통을 들고 집에 갔단다. 어떻게 들고 갈 수 가 없어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아저씨에게도 두 통을 줬다고 들었다. 거의 마더테레사 수준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