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la에 대한 강렬한 추억
20년 2월 말 뉴욕(New York).
뉴욕의 추위를 잊어버린 채 호기롭게 캐시미어 니트와 바버 재킷으로 추위를 견뎌보려 했다.
왜 2월 말을 봄의 시작이라고 착각했을까? 그때 당시 마음이 추웠던 터라 얼른 봄이 오기를 바라서였을까? (이때 당시 한국은 코로나(Covid-19)가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고, 미국은 아직 마스크도 쓰지 않고 심하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내가 있던 일주일이 지나고 뉴욕은 공포의 도시가 되었지만)
아니면 캘리포니아(California)의 따뜻함에 익숙해져 뉴욕의 한파를 잊어버렸던 걸까?
LA에서 뉴저지(New Jersey) 친구 집으로 온 다음 날 친구는 출근을 하고 나는 점심을 맨해튼(Manhattan)에서 먹는 걸로 결정하고 집을 나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름 괜찮았던 날씨가 오늘따라 수상하다. 정오가 되어가는데, 하늘은 콘크리트 정글 색이다. 뉴저지에서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급행 버스를 기다린다. 구글 지도에서 시간이 나와 있는지라 시간에 맞추어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하나 둘 사람들은 늘어가고 버스 올 시간은 다 되었는데 버스가 나타나지를 않는다. 구글 지도상에 버스는 이미 지나간 걸로 나오는데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가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기 시작하는데, 대책이 서질 않는 듯하다. 본인은 직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우버(Uber)를 타야겠다고 한다. 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고 우버로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 그냥 여자를 보내고 버스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도 못 먹은 터라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니 추위는 더 매서웠다. 같이 버스를 기다렸던 중국인 가족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뉴저지에서 맨해튼으로 넘어가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인지라 막막했는다. 그때 버스를 타러 온 동네 주민 하나가 말을 건다. 버스가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완행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나까지 챙겨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일단 너무 추워서 뭐라도 빨리 타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 온 뉴욕인데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한 블록을 올라가니 완행 버스가 오는 곳이 있었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얼마 후 버스가 도착했다.
급행버스를 타면 30-40분 정도 가는 길을 온 동네를 다 돌아 1시간 반정도 걸려 펜 스테이션(Penn Station)에 도착했다.
추운 곳에서 비도 맞고 오래 떨었더니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온 뉴욕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어야지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일단 빨리 뭐라도 따뜻한 걸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펜 스테이션을 빠져나왔다. 42번가 타임스퀘어(Times square)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홀 푸즈 마켓(Whole Foods Market)이 눈에 띄었다. 일단 들어가서 한 끼를 때웠다. 그런데도 몸이 녹지 않았다.
뜨끈한 라테를 마셔줘야 몸이 녹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래도 커피는 맛있는 걸 먹어야지 생각하며 거리를 나섰다. 뉴욕에 가면 블루 보틀(Blue bottle)은 꼭 가봐야지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한파와 싸워가며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 옆에 있는 블루 보틀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첫 방문인 블루 보틀에서 어떤 걸 마셔야 하나 메뉴판을 살펴보다가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뉴올리언스 스타일(New Orleans Style)이었다. 뉴욕에서 웬 뉴올리언스 스타일인가 싶었겠지만 눈에 들어온 그것! 그리고 한국에 왠지 없을 것만 같은 것을 마셔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얼어붙은 입을 열심히 굴려가며 주문했다.
"New Orleans Style, Please."
라테를 마실 생각에 들떠서인지 추워서 잘 보이지 않던 창 밖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스케이트장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뉴욕이지! 따뜻한 라테 한 잔과 함께 뉴욕의 겨울을 즐길 상상을 하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내 닉네임이 불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의 첫 블루 보틀, 뉴올리언스 스타일을 가지러 갔는데,
아뿔싸. 잔에 들어있는 얼음들이 날 보고 썩소를 날린다. 안녕? 나야 나. 귓가에 들리던 모닥불 소리와 따스한 바이올린 선율이 와장창 깨지면서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점원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나에게 이 추운 날 아이스를 줬느냐! 왜 주문할 때 hot 인지 iced 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느냐 하고 따지려던 순간, 메뉴판이 내 눈에 다시 들어왔다.
'Iced Coffee'
아, 새로운 스타일을 경험하려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는구나. 생각하며 아직 마시지도 않았지만 이미 냉해진 속을 다시 부여잡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Hot water, please."
점원은 아까만큼이나 친절하게 따뜻한 물을 내어주었다. 커피를 마시기도 전에 따뜻한 물부터 마시고 시작하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뜨거운 물도 호호 불어 마시고, 차디찬 뉴올리언스 스타일도 호호 불어 마셨다. 맛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사실 너무 추워서 그 맛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눈물겨운 첫 커피의 추억이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DTLA에 있는 블루 보틀을 방문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뉴올리언스 스타일을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문했다. 그런데 그때의 떨리는 기억이 떠올랐던 걸까? 내 혀가 마구마구 꼬이고 말았다.
"뉴, 뉴얼리 뉴얼리언 뉴올리에베베..."
캘리포니아 특유의 낙천적이고 친절한 점원이 하하하 웃는다. 그러면서 괜찮다며 말한다. 우리도 발음이 꼬일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냥 'Nola, please'라고 하세요 했다.
같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다음에 주문할 때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시 마주한 Nola의 맛은?
그래! 이 맛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