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을이 왔다는 건 시끄럽던 매미 울음 대신 귀뚜라미 울음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할 때이다. 이쯤이면 고향으로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추석, 설 명절만 되면 좁디좁은 나라에서 민족 대 이동이 시작된다. TV 뉴스에서 연휴 기간 서울에서 부산까지, 서울에서 목포까지 몇 시간이 걸릴 것이냐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귀향길 기차표와 버스표 예매도 명절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지금이야 온라인 티켓팅이 가능하지만, 현장 구매만 가능했던 시절엔 기차표는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버스표는 터미널에 나가서 밤새도록 줄을 서야만 티켓팅이 가능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 가족은 티켓팅을 포기하고 늘 자차를 이용했다.
추석은 날씨가 좋아서 차로 움직이기 좋다. 문제는 소요시간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고속도로도 많이 없던 90년대. 내비게이션은 당연히 없다. 이 조건에서 인천-전남 장성까지의 최고 기록은 25시간. 아니 그런데, 우리나라가 광활한 대지와 끝없는 지평선을 가진 곳도 아닌데 25시간이라니! 어디 들렀다 간 게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오직 길에서 만꼬박 25시간을 버티다 고향집에 입성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다. 연휴 기간에 따라 귀향 길 소요시간이 달라지기에 출발 시간을 계획하고, 비장한 각오 후 떠나야 하는 짧지만 긴 여정이었다.
(아빠의)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지만, 맛있는 음식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기에 갑갑한 차 속에서도 잘 버틸 수 있었다. 지금에야 스마트폰이 있어서 덜 심심하지만 당시엔 한정된 공간에서 지루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루함과 갑갑함을 이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먹거리다. 이동하기 전날엔 차에서 먹을 간식을 사곤 했다. 그동안 먹어보지 못한 과자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건 제일 신나는 일이다. 아빠는 집에 가는 게 신이 나서 그랬는지 이때만큼은 먹고 싶은 만큼 모두 골라 담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필요한 건 노동요. 우리나라는 산을 뚫고 지나는 고속도로가 대부분이라 라디오 주파수가 잘 안 잡힐 때가 많다. 라디오가 안 나올 때는 카세트테이프가 필요한데, 집에 있는 테이프를 다 가져갈 수가 없기에 동생과 신중에 신중을 기해 음악을 선별했다. 아빠가 졸릴까, 음악을 틀고 다 같이 노래를 하면서 신나게 달렸다. 물론 아빠의 취향은 아니었을 테지만.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전국 도로지도는 필수였다. 귀향길이 시작되면 늘어나는 교통량으로 경찰은 고속도로 입구를 막아버렸다. 인천에서 출발한 우리는 수인 산업도로를 지나 오산 IC에서 경부선을 타야 했는데, 이미 고속도로를 매운 차 때문에 고속도로 진입은 늘 실패했다. 눈물을 머금고 차를 돌려 국도를 탔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전국 도로지도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전엔 트로트 음반만큼 휴게소에 깔려 있었던 게 전국 도로지도였다. 지도는 고속도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달릴 수 없는 곳보다는 좀 돌아가더라도 달릴 수 있는 길을 찾아주었다. 지도가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고, 보기가 쉽지 않아서 종종 길을 잃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길을 잃은 것이 때로는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을 만나기도 하고, 막히지 않고 계속 달리는 매직이 일어나기도 했다. 추석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설은 추석보다 더 힘들다. 눈이라도 내리면 길이 엉망이 되어 힘든 귀향길이 된다. 항상 도착하기 직전 폭설이 퍼붓곤 했는데, 이 때문에 집을 코앞에 두고 몇 시간을 엉금엉금 기어야 했다.
아빠는 경부선을 타고 대전을 지나 호남선을 탈 때면 ‘이제 거의 다 왔다!’ 라며 고정 멘트처럼 말한다. 실제로는 훨씬 많이 남았지만 그 말 한 마디면 왠지 안심이 된다. 호남선을 타면서부터 막혔던 길이 점점 뚫리며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도 설렌다. 휴게소도 뒤로한 채 막판 스퍼트를 내본다. 드디어 마지막 휴게소인 정읍 휴게소, 최장 터널이던 호남터널을 지난다. 터널을 벗어나면 벗어둔 신발을 주섬주섬 신기 시작한다. 어둑한 밤이나 새벽녘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주는 건 꼬리를 흔드는 시골 개의 인사다. 그리고 그 소리에 언제 오려나 설잠을 주무시며 기다리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곳엔 이제 아무도 없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명절을 보내기 위해 몇 해 더 내려갔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난 뒤에서야 명절 로드트립은 끝이 난다. 명절 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만, 나에게 떠오르는 건 가족과 함께 한 로드트립이다. 명절 로드트립은 아빠와 엄마의 사랑, 희생, 인내가 녹아있는 귀한 여정이다. 그래서 길 위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결코 아깝지 않다. 언젠가는 나도 명절에 나와 내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고향집을 향해 갈 날이 있겠지. 그때가 오면 내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길을 떠날 것이다. 추억을 꺼내보면서.
*이 글은 2w 매거진 4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