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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azing Grace YJ Dec 21. 2023

유통기한이 있는 삶

출처 : 네이버
如果爱情也有流通期限,我希望是一万年。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의 대사.

실연당한 그에게 사랑의 유통기한은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아닌 일의 유통기한이 만년이라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일의 종료, 마감이라는 것은 묘한 구석이 있다. 끝이 있기에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갈 때 파이팅 넘치게 만들기도 한다. 고지를 앞에 두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게 되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결승선이 없는 달리기를 누가 할 수 있을까? 끝이 없는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끝이 없는 일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지만, 몇 가지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집안일. 집안일은 마감이 없다. 오늘 해치웠다고 기뻐하며 돌아서는 순간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일도 없이 늘 같은 일의 연속. 빌 머레이 주연의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눈을 뜨면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때가 또 다른 시작이다.

또 다른 끝없는 일 중의 하나는 육아다. 집안일과 같이 끝이 없다. 하지만 이건 집안일과는 좀 다르다. 육아는 매일 새로운 맵의 연속이다. 맵 안에서 매일 오픈되는 퀘스트와 함께 경험치와 스킬을 레벨 업 시킨다. 레벨 업이 되면 좀 수월해지나 싶다가도 새로운 스킬을 요구하는 주인공 때문에 HP는 늘 바닥을 친다.

집안일과 육아를 겪으며 그동안 사회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겪었던 마감들을 생각해 본다. 그때는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싫었던 마감이었지만 그래도 일을 끝내고 난 뒤의 성취감이나 개운함은 꽤나 괜찮았던 것 같다. 마감 후 가졌던 커피타임이라든지, 마감 후 내게 선물했던 소소한 쇼핑의 순간들이라든지.


마감이 없으면 마음의 쪼임이 없기에 여유를 가지고 더 열심히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기한이 없다면,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글피도 있는데 뭐 하면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고 또 미루는 뫼비우스의 띠가 완성될 것이다. 끝이 없이 맴도는 미완의 상태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끝이 있기에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비록 집안일도 육아도 끝이 없다고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형태로 마감이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유통기한이 매우 길 뿐. 기나긴 유통기한이 만년은 아닐 거라 굳게 믿으며. 오늘의 바닥난 HP를 충전하러 노트북을 열어본다. 그리고 마감이 있음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해 본다.


* 2W 매거진 41호 23년 12월호에 투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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