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레비, 일상 속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들-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대형 배급사의 대형 관람관이 아닌, 이런 소규모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관람 전 과정을 포함해 조금은 남다른 사용자 경험(User Experinece)을 선사한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아날로그적인 관람 확인 절차. 순서대로 줄을 서서 표를 보여주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영화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했듯 매우 잔잔했다. 누군가에겐 지루함으로 느껴질 수 있을 만큼.
전반부에 거의 대사가 없는 주인공의 모습. 첫 대사를 하기까지 5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아 처음에는 그가 말을 하지 못하는 역할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눈빛과 표정으로 미묘한 감정변화를 표현하며, 다른 이들과 거의 상호작용이 없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물의 평범한 일상을 잘 보여주었다. 대사 대신 차를 운전할 때마다 트는 카세트테이프 속 음악 가사가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조카가 온 후 부쩍 말이 많아진 그. 조카가 엄마가 “삼촌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고 말했다고 했을 때, 세상에는 연결되지 않은 세상들이 있다며, 바다로 연결되는 길로 가지 않고 눈앞에 주어진 강변길을 따라가는 그.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를 외치는 그와 그를 따라 이 말을 메아리처럼 연호하는 조카.
여동생이 조카를 찾으러 와 오랜만에 이루어진 혈육 간의 조우. 하지만 닿을 수 없는 두 개의 우주처럼 둘은 서로 간의 거리감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공유된 기억인 ‘초콜릿’은 오래전 가졌던 둘 사이의 작은 접점을 상기시킨다. 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향이동했음을 짐작케 하는 동생과의 대화. 동생과 조카가 돌아간 후 말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누구나 느낄지 모를 삶의 회한과 외로움, 고독감, 처연함이 느껴졌고 그의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남자와 그를 지켜보는 주인공. “그림자가 겹쳐지면 더 어두워질까?”라는 단순한 질문의 답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삶은 어느새 작별을 고하려 한다. 담배를 태우는 것도 어설프고, 그림자가 겹쳐지면 더 어두워지는지에 대한 답도 알지 못하는 중년의 두 남성. 주인공은 삶의 마지막을 목전에 둔 남자에게 그림자놀이를 제안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한 중년의 남성들. 때로, 아니 자주 우리는 삶을 너무 무겁고 어렵게 대한다. 하지만 답을 알지 못하는 무수한 질문들 앞에서, 조금 더 단순하고 가볍게, 즉흥적인 어린아이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람들과 많은 말을 하거나 많은 교류를 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음악과 식물, 사진을 통해 매 순간에 충실한 그의 삶.
매일 점심시간마다 공원을 찾아 ‘도모다찌(친구)’ 나무와 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기록하는 그의 일상. 그의 옷장에는 연도와 월별로 이 사진들을 모아놓은 정리함이 소중히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오르고 난 후, ‘토모레비’라는 일본어 단어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토모레비
こもれび [木漏れ日·木洩れ日]
명사)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 타인에게 모두 이해받지 못하는 삶이라도, 모두와 연결된 세상이 아닐지라도, 일상 속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토모레비를 소중히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다면, 모든 날이 퍼펙트 데이즈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