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Y Works

첼로를 통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의 단계

Death Stages for Violoncello 2010作

by Hemio

첼로를 통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의 단계

*이 곡은 실황녹음 되었음


"죽음의 단계 (Death Stages for Violoncello)"는 첼로 독주를 위한 곡이다. 이 곡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제시한, 인간이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겪게 되는 보편적인 심리 변화의 5단계를 음악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나의 시도였다. 약 15년 전, "인생 수업"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사유와 실존적 고뇌에 빠졌던 경험이 이 곡의 씨앗이 되었다. 필멸성(必滅性)이라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 겪는 내면의 여정을,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인 '음악'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은 음악적 표현과 철학적 고민을 통해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I. 부정 (Denial)

곡의 시작은 첼로의 가장 낮은 현인 C현을 지속적으로 울리는 페달 포인트(pedal point)로 열었다. 이 낮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리를 통해 존재 깊숙이 자리한 불안감과 실존적 흔들림을 상징하고자 했다. 그 위에서 흐르는 선율은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냉정한 인식 사이의 끊임없는 내적 갈등, 즉 인지 부조화 상태를 묘사하려 했다. 지속되는 저음과 변화하는 상성부 선율을 병치함으로써, 다가오는 진실을 부정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며드는 현실 인식 사이의 간극을 청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II. 분노 (Anger)

두 번째 단계는 강렬한 포르티시시모(fff)의 중음역 소리로 갑작스럽게 시작하여 내면의 격정을 터뜨린다. 내가 여기서 주목한 점은 분노의 표현이 단순히 커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인간의 분노 표출이 최대치를 향해 직선적으로 증가하기보다, 순간적인 억제나 망설임(p)을 거친 후 다시 격렬하게 폭발(fff)하는 비선형적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음악적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분노라는 감정의 복잡성과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의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III. 타협 (Bargaining)

격렬했던 분노의 단계 직후, 이중음(double stops)을 등장시켜 타협의 국면을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는 절대적인 상황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과 구원을 향한 갈망을 그리고자 했다. 주요 선율은 단선율로 제시하여("만약 내가 ~한다면...") 가느다란 희망을 붙잡고 조건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나타내도록 했고,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이중음은 초월적 존재("절대자시여")를 향한 호소나 "살려 달라"는 절박한 간청의 순간을 강조하도록 했다. 극한 상황에서 신이나 운명 같은 초월적 힘과 협상하려는 인간 심리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IV. 우울 (Depression)

이 곡에서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다. 이 단계는 피치카토(pizzicato) 주법으로 시작하며, 의도적으로 어떤 악상 기호도 넣지 않았다. 피치카토는 음이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특성이 있는데, 이를 통해 채울 수 없는 상실감과 존재론적 허무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나는 음악적 기보(악보 위 표기)와 기술적 기보(실제 연주 소리) 사이의 차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악보에 쓰인 음표는 지속되기를 바라는 생명의 의지, 즉 이상(理想)을 나타내지만, 실제 연주되는 피치카토의 짧고 소멸하는 소리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도록 했다. 즉, 악보는 '살아가고 싶은 나'의 염원이지만, 덧없이 사라지는 피치카토 소리는 '죽어가는 나'의 실존적 상태인 셈이다. 이후 아르코(arco, 활 사용) 주법으로 넘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 특히, 이중음이 반음씩 오르내리며 진행되는 클라이맥스 부분은, 죽음이 다가옴에 따라 심장이 죄어오는 듯한 신체적 고통과 극도의 심리적 압박감을 소리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V. 수용 (Acceptance)

마지막 단계는 강렬한 스포르잔도(sfz) 직후 여린 피아노(p)로 급격히 전환하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심리적 평정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 수용이 마냥 밝거나 기쁜 것은 아니다. sfz의 짧고 강한 악센트는 어쩌면 마지막 남은 저항의 흔적일 수도 있고, 뒤따르는 p는 격렬한 내면의 싸움을 거친 후 찾아온, 지친 평화 혹은 체념에 가까운 고요함을 나타내도록 의도했다. 이전 단계들의 격동적인 심리 과정을 겪으며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수용이기에, 그 평온함 속에는 깊은 슬픔과 삶의 무게가 여전히 느껴지도록 표현했다.


이 곡은 죽음이라는 보편적이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 앞에서 내가 경험하고 사유했던 복잡한 내면의 풍경을 첼로라는 악기를 통해 탐구하고자 한 나름의 결과물이다. 나의 이 음악적 해석이 듣는 분들 각자의 경험과 성찰에 가닿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