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과 살아간다는 것.

작곡도 삶도 고민과 시행착오 속에서 그려가는 음악이자 인생이다.

by Hemio

프레이즈의 시야, 그리고 삶의 리듬


작곡을 할 때, 한 번에 보이는 것은 대개 한 프레이즈,
짧게는 두 마디, 길어야 네 마디 정도다.
그 이상의 흐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감’만 있을 뿐이다.
음이 다음 음을 부른다는 직감,
지금의 화성에서 어디로 향해야 조화로울지를 아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 위에 쌓인 수많은 시도와 실패의 경험이 있다.


이것이 음악적 시간의 본질이다.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한 걸음’을 감각하는 것.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명확히 예측할 수 있는 미래는
길어야 한두 주, 혹은 한두 달 정도다.
그 이후의 시간은 악보의 여백처럼,
보이지 않지만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그 여백이 바로 삶의 리듬이 숨 쉬는 공간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음이 들어올 수 있다.



삶은 분기점의 반복이다


음악에는 언제나 종결되는 분기가 있다.
한 테마가 끝나면, 새로운 테마가 시작된다.
하나의 악장은 완결되고, 다른 악장이 열리듯이
삶도 그렇게 움직인다.


직장, 관계, 계절, 마음의 온도
모두가 하나의 테마로 시작해
언젠가 엔딩 마크를 맞는다.


문제는 그 전환의 순간이다.
작곡가에게 그것은 새로운 모티브를 찾아내는 순간이며,
삶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간이다.


전환은 언제나 불안하다.
음악에서는 그것이 조바꿈(modulation)으로 나타난다.
익숙한 조성을 떠나 다른 영역으로 이동할 때,
청자는 약간의 긴장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음악의 서사적 밀도를 만들어낸다.


삶의 전환도 마찬가지다.
직업의 변화, 인간관계의 이별,
익숙했던 세계를 떠나는 결단
모두가 불협화음처럼 들리지만,
그 불협이야말로 다음 조성을 위한 필수적 불안정이다.



모티브의 변주, 존재의 연속성


좋은 작곡가는 완전히 새로운 테마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이전 모티브의 일부를 끌어와
새로운 구조로 변주한다.
그것이 곡의 일관성과 서사를 만든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신’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경험과 감정, 기억의 잔향들을
새로운 리듬 속에서 재배열할 뿐이다.


어릴 적의 좌절이 인내로,
상실의 기억이 공감으로,
지나간 실패가 다음 시도의 리듬으로 변주된다.


좋은 인생이란
완전히 새로운 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테마를 더 깊게 울리는 삶이다.


모티브는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내면의 DNA가 남긴 리듬이다.
그것을 어떻게 변주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조성이 달라진다.



리타르단도의 순간


음악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
대개 음을 길게 늘인다.
그것은 페르마타이자 쉼표다.
그리고 그 직전에는 어김없이

rit. 점점 느리게가 붙는다.


속도를 늦추는 이유는 종지의 느낌을 내고
다음 주제를 준비하기 위해서.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환의 직전에는 반드시 ‘느림의 구간’이 온다.
모든 게 갑자기 정지하는 듯한 시간.
무언가가 끝나고,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그 공백.


그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구간이다.


리타르단도의 구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테마를 정리하고,
다음 악장의 모티브를 발견한다.


그 시간 없이는
새로운 주제가 자연스레 들어오거나 전환되기는 어색하다.



삶의 템포, 음악의 시간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음악이 그러하듯, 삶의 시간도 리듬을 가진다.
빠르게 흐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뜻밖의 정지와 여운이 있다.


우리는 그 리듬을 통제할 수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어떻게 연주할지를 선택할 뿐이다.


음악이 연주자에 따라 다르게 울리듯,
삶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조성을 가진다.


삶을 작곡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정확히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이어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만의 템포를 찾는 것.



마지막 페르마타


삶은 멈추지 않는다.
다만, 다음 소리를 위해 숨을 고를 뿐이다.


지금의 여백이 두렵다면,
그건 당신이 새로운 주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음악처럼, 인생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전환과 여운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rit. 점점 느리게......
당신의 삶도 악보처럼,
하나의 테마가 끝나고, 또 다른 테마로 이어질 것이다.


그 여백 속에서,
당신만의 모티브가 다시 들려올 것이다.



Composer’s Note


삶은 거대한 교향곡이다.
우리는 각자의 테마를 가지고 태어나
모티브를 변주하며 살아간다.
완성된 악보는 없다.
다만, 그때그때의 호흡으로
당신만의 리듬을 이어갈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프레이즈가 하나로 이어질 때
당신의 삶은 하나의 완성된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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