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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iyou Apr 14. 2020

밤의 어른이 남긴 글

황현산 ,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3년 06월

  잘 쓰고 싶어 잠 못 이루던 밤이 길었다. 재능이 욕심을 따라가지 못해 자주 아팠던 학기였다. 수업 내내 눈물을 눌러 참다가 집에 돌아오면 쏟아내곤 했다. 교수님은 침묵 속에서 황현산 선생의 『밤은 선생이다』를 추천했다. 그의 글을 통해 산문의 정수를 느껴보라 했다. 곧바로 서점에 들러 검은 표지의 책을 손에 들었다. 코팅되지 않은 표지를 한참 동안 매만졌다. 종이의 질감이 표지의 노인의 뒤통수의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컴컴한 밤, 어두움 속에서 침침한 눈을 뜨고 글을 써 내려가는 노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의 얼굴을 찾아보았다. 그전까지 내게 선생은 표지 속의 노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읽기를 난다 출판사의 대표인 김민정 편집자가 표지 작업을 두고 고민하다 ‘민머리 노인의 뒷모습’을 떠올렸고, 이전에 갤러리 구석에서 보고 찍어두었던 그림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책을 시작으로 황현산 선생의 책을 작업할 때는 ‘팀 아이텔’의 그림을 준비해두었다고 도 했다. 한 작가의 책을 또 다른 한 작가의 그림과 연관 지어 두고서 생각하다 보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지만, 그 작가를 떠올리며 그리는 이미지를 확고히 할 수 있다는 장점도 동시에 있다. 난다에서 출판한 황현산 선생의 책 표지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잘 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늘 성장통이란 말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런데 합당한 말인가. 그 말이 비록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가득 안고 있다 하더라도, 젊은 날의 고뇌와 고투를 그 미숙함의 탓으로 돌려버리게 하기에도 십상이다.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
p.88 <봄날은 간다> 中


  『밤이 선생이다』를 완독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읽다 포기하고, 다시 포기하고를 몇 번 반복한 끝에 80편의 산문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서는 글이 어렵다기보다 그 글을 읽는 당시의 이해력과 집중력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술술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문학 비평가답게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일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깊이가 있었다. 주절주절 긴 글을 써 내려가는 내게는 고작 3페이지 분량 속에 정확한 논지와 그의 생각, 경험을 깊이 있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채워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이 책은 황현산이라는 어른의 겸손한 태도를 담고 있다. 시대의 문제를 경험을 토대로 논지를 풀어낸다. 그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한 시대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 4대 강 사업, 2011년 국사교육 강화 등 시의성을 띤 글들이 한 데 묶인 까닭이다. 30년 동안 쓴 그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며 3부로 나누어 편집했다. 1부에서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어른으로서의 태도와 시선을 마주하도록 했다. 사회·문화 등 당시의 뜨거운 감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2부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파생된 생각과 사진에 대한 평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에 대한 풍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마지막 3부에서는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를 썼다. 자신에 대한 성찰도 들었다. 결코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게 되는 책이고, 그래야만 의미가 있는 책이다.


  어디선가 황현산 선생을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라 칭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우리 시대에 진심을 다해 진실을 말해주는 어른’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내겐 멀고 어려운 존재로 느껴졌지만, 반드시 읽어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작가의 말에 쓴 그는 남을 깎아내리는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조심스럽지만 따끔하고, 묵직한 울림을 주는 말들로 감고 있던 눈을 뜨게 만들었다. 더불어 자신에 대한 성찰까지 가감 없이 담아냈다. 그렇기에 그를 어른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독자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세상에 좋은 글은 많고, 대부분이 자신의 논리를 펴고 있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황현산이라는 어른을 이 책을 통해 만난 후로 나는 가슴 한쪽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책의 생산은 작가와 편집자, 출판 관계자의 몫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임을 안다. 그럼에도 책을 만든 이들의 땀 속에 품었던 바람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준다면 그들은 위안을 얻을 테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가 바라는 인간군상, 어른, 지식인의 면모를 갖춘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단 지식인의 것만이 아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그 자격을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그에 맞는 태도를 스스로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 세상을 일구며 살아내다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의 언어들은 이제 책 속에 남았다. 그의 독서법, 진심을 담은 문장이 남았다. 이 책을 쓴 저자뿐 아니라 엮어 세상에 남겨준 이들에게 감사하다. 세상이 더 나빠지고, 그 속에 내가 휩쓸릴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일 때 떨리는 손으로 다시 펴 볼 수 있을 책이 생겼다. 신념과 태도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될 책이 책장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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