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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iyou Apr 14. 2020

일상의 반짝임, 다독임

오은, 다독임,  난다, 2020년 03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저 ‘한번’에는 내가 여태 잊지 않은 공간, 심신에 새겨진 시간, 그 안에서 몸소 겪은 일이 다 들어 있다. 글을 써보면 알게 된다. 무수히 많은 일 중 하나였던 ‘이런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든 특별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다독임』 p. 272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中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유독 쨍한 색감을 좋아하는 나는 시를 몰라 부끄러운 마음에, 시집을 끼고 사는 선배에게 시집 추천을 부탁하며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때 선배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내게 툭 던져준 시집이 오은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였다. 분위기를 사랑한다니, 우리가 사랑하는 분위기는 뭘까. 하며 집어 든 시집의 주황빛 표지를 보자마자 결제 창구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목도 있지만 내가 그 책을 주저 않고 구입한 데는 주황색 표지가 전부였다. 수많은 글 중에서도 유독 시를 어렵게 여기던 내게 그의 시는 신세계였다. 생각보다 책장이 잘 넘어가는 데다 단어를 갖고 노는 그의 문장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사람 참 재미있다,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에 설렜다.


단어들은 그렇게 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기다리고 품고 헤어지고 또 한 시절을 헤매다가 처음인 양 다시 스칠 것이다. 모든 시집은 단어들의 임시 거처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시인의 말 中


  그 날 이후로 친구들에게 책을 추천할 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를 권했다. 시집을 몇 권 읽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좋은 걸 어떡하나. 그냥 그의 시를 읽으면 설렜다가 좋았다가, 착 가라앉았다가 그러는 것을. 그렇게 시를 몇 권 읽지 않은 내가 그의 차기작들을 사서 읽었다. 오은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대가 되었다. 아일랜드에 살 때 한국에서 택배로 『나는 이름이 있었다』를 받았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시라는 것은 종이의 질감으로 느껴야만 제 맛이 난다고 느껴졌다. 한국에서 받은 열 권 남짓의 책 중에는 난다의 책이 3-5권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책들은 이제 그 땅에서 수많은 사람의 속을 돌고 돌아 살아남을 것이다.


  난다는 시를 어렵게 느끼는 독자에게 시인들의 호흡을 매력적으로 접하도록 하는 데 재능이 있다. 서사에 의존해서만 글을 이해하는 내게 단어 그 자체, 문장의 매력을 알게 한 책들이 주로 난다에서 나왔다. 시인의 호흡은 소설가의 호흡과는 또 다르다. 시인의 문장은 소설가의 문장과 또 다르다. 시를 어려워 멀게만 느끼던 독자에게 시인의 호흡을 산문의 형태로 가장 잘 읽히도록 만들어 독자 앞에 놓아주는 출판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은의 『다독임』도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여전히 어려운 시의 호흡을 산문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산문처럼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다 보니 오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내는 쌀알 같았다.


머릿속으로 단어 하나를 떠올리고 그 단어가 불러들이는 다른 단어를 기다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독임』 P.64 – 나도 모르게 시작했다가 나도 모르게 끝나는 것 中


대화하다 무심코 튀어나온 단어가 내 시의 출발점이 된다. 그 단어가 문장을 이루고, 그 문장이 다음 단어를 불러들이면서 시가 서서히 골격을 갖추어간다. 문장들이 켜켜이 쌓여 겹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백지는 평면이고 문장은 추상이지만, 그것이 두 개 이상 만나 어떤 부피를 획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이 가장 설렌다.
『다독임』 P.154~155 – 나의 다음은 국어사전 속에 있다 中


  시인 오은은 동음이의어 활용의 귀재다. 그의 시를 읽었을 때 단어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산문집 안에 단어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자신에 대해 쓴 글이 있었다. 단어가 하나의 공이라면, 그는 그 단어를 굴려도 보고 만져도 보고 입안에 넣어 맛보기도 하는 듯하다. 그가 시인으로 작가로, 사람을 세상을 단어를 문장을 글을 대하는 태도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설렘과 예쁜 태도가 느껴져서 내 마음속에도 예쁜 울림의 파도가 일었다. 


발견하려는 태도와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일상에 생기를 가져다준다. 익숙함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낯섦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외연뿐만 아니라 삶을 감싸는 사고의 외연도 넓혀준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다독임』 P.185 - 시를 읽는 이유 中


  이 책은 작가가 목격한 일상, 그리고 그 속의 무수한 다독임의 순간을 포착해 담아낸 산문의 모음이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햇수로 6년 간 쓰인 그의 산문들이다. 차례로 읽어도 좋지만, 어느 페이지부터 시작해도 좋다. 읽는데 막힘이 없는 글이지만 단어의 변형, 활용을 통해 다시 문장을 되새기도록 한다. 문장 속에는 오은만의 단어들이 있다. ‘나 자신’, ‘역설적으로’, ‘법석이다’ 등 그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딘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단어를 발견하는 기쁨을 선물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본 표지 색감과 실제 책의 색감이 조금 다르다. 화면 액정 상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실물로 책을 만져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밑줄을 친 문장이 많은 걸 보니 구매한 것을 후회할 일은 없다. ‘다독임’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한 책의 첫 느낌과 표지의 사진이 너무 잘 어울렸다. 어린아이에게서 나는 그 열감 어린 냄새와 다독임이라는 단어가 주는 훈훈한 냄새가 이 책의 분위기가 되었다.


가족을 돌보고 가까운 이들을 챙기고 반려식물에 물을 주고 단어를 돌보며 책을 껴안는 일, 그것은 나의 숨통을 틔우는 일이기도 했다. 한밤의 다독임에는 늘 책이 있었다. 다독(多讀)하는 일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나와는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게 없는 사람에게조차 눈길이 갔다. 나도 모르게 다독다독 감싸고 달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독임』작가의 말 中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서로를 보듬고 감싸고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줄 수 있다. 생채기를 내는 것도 사람이지만, 새살을 돋게 하는 것도 사람이다. 울컥울컥 차오르는 슬픔의 뜨거움을 벅차오르는 기쁨의 것으로 바꾸는 것도 사람이다. 우리는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공감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나는 당분간 공감의 말과 함께 이 책을 응원의 선물로 내밀 생각이다. 책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적지 않다. 책장을 넘기는 것이 그들의 어깨를 토닥이는 효과를 주길 바란다. 또한, 그 얼굴들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다독임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을 책이 생겼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함께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은 절로 뜨거워진다. 그것은 빤한 위로나 날카로운 조언보다 힘이 된다. 공감이 위안에 가닿는 놀라운 순간이다.
『다독임』P.147 - 슬프면서 좋은 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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