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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iyou Apr 16. 2020

부끄러운 어른

  어느덧 스물여섯이 되었다. 내 나이를 자각하게 될 때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친구들과 허탈하게 ‘우리가 벌써 스물여섯이라니’ 하며 씁쓸하게 웃곤 한다. 아직 스물, 아니 그 이전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했다. 열일곱, 강세형의 산문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를 읽으면서였다. 단순히 나이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 듯했다.


  흐릿하던 고민이 고개를 치켜든 것은 스물둘 무렵이었다. 교회 유치부에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일주일에 두 시간 남짓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고 뛰며 예배드리는 시간은 내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어린이들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사회 속의 다양한 슬픔을 만날 수 있다. 고작 네 살짜리의 눈망울에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읽었고, 다른 아이의 것을 탐내며 떼를 부리는 다섯 살에게서 가난의 그림자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마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고통의 무게를 생각했다. 나는 어떤 어른인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여전히 확실한 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구체적인 상(相)은 그릴 수 있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은 되지 못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은 되지 말자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을 마주했던 때였다. 이런 세상 밖에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를 이길 힘이 없다는 사실에 작아져 한참을 울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같은 인간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속에 새겼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을,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자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는 어른들을 본다. 그들은 때로 내 주변의 어른이고, 내 부모이기도 하다. 전에는 그렇지 않던 사람이 왜 저렇게 되었나 싶다가, 혹 미래의 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것을 탐하는 태도를 한 tv 프로그램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꽃보다 할배>라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여든이 넘은 배우 이순재 씨의 모습을 통해서였다. 그는 어두운 비행기 속에서 홀로 불을 밝히고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 정도 나이면 배움을 귀찮아할 법도 하고, 그저 편승하여 누리기를 바랄 법도 한데, 그의 모습에서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험하는 세계가 넓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단단해지기보다 부서졌다. 굳건하게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쌓아 올리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그 영역을 확장해갔다. 앞으로도 그렇다. 센 것에 굴복하고 타협하지는 않고, 내가 옳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태도. 그렇게 나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하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싶다. 잃고 싶지 않다. 노인의 눈에서 청년의 열정을 보았던 그 장면을 잊고 싶지 않았다. 나의 노년에도 그의 것이었던 총기가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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