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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miyou Apr 14. 2020

같잖은 나에게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가 있지만 욕구가 꼭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중 으뜸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일 것이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은 뒤로 미뤄둔 채 타인의 시선이 자아를 재단하는 것에 목을 맨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얻었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기대한 결과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고 실패자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 판단은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구멍이 생긴 자존감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사를 하다 벽장 깊숙이 들어있던 파일 하나를 꺼냈다. 1999년의 내가 그 속에 있었다. ‘유아행동발달관찰평가표’라는 오래된 서식을 읽어 내리다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내 씁쓸하게 변했다. 어린 나는 편식과 늦은 식사속도로 선생님을 힘들게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선생님의 꾸중 몇 마디에 개선됐다. 양 갈래 머리를 한 네 살 배기는 “선생님, 오늘은 밥을 일등으로 먹을 거예요.”하고 열의를 보였고, 김치를 다 먹었다며 자랑스럽게 식판을 보여주기도 했단다. 그 모습이 어찌 보면 사랑스럽고 또 어찌 보면 안타깝다. 나는 스무 해 동안 변치 않고 인정받지 못해 안달 난 사람으로 자라났다.


  욕구가 과해져 욕심이 되었고, 욕심은 갖지 못한 것들을 욕망케 하는 못난 시기가 되었다. 질투와 시기는 대상에 가림이 없었다. 때론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피를 나눈 형제였다. 잠깐 휴학을 했던 2017년 봄, 나는 계절이 바뀌는 동안 질투를 이기지 못해 아팠다. 함께 공부했던 학우들이 취업을 했단 소리가 들려와 배가 아팠던 거다. 충분히 잘 해내고 있었던 회사생활인데도 만족이 되질 않았다. 동기들이 꿈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나는 뭘 하고 있나 조바심이 났다. 시험을 치고 과제를 한다는 친구들의 연락을 견디기가 힘이 들어 한 동안 메신저를 꺼둔 적도 있었다. 축하할 일을 축하하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그렇게 한 계절을 앓았다. 그들보다 잘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재능을 질투했다. 뭐하나 특출 난 게 없어서 아등바등 잘해보려, 이겨보려 용을 썼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보단 아래인 내가 미웠고, 그가 미웠다. 평생을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더 큰 세계로 나갈수록 작고 초라한 존재가 되어가는 내가 불안했다. 사람들 틈에서 흐릿해지다 결국 잊힐까 겁이 났다. 흐릿해진 존재감에 불안하다는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 수년을 붙어 다닌 친구가 몇 년 전 내게서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모든 중심이 나와 그들을 향해 있었을 때 나를 미워했다고 했다. 우리는 미워하는 감정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음 한 구석이 빈 것 같았다. 보잘것없는 나를 인정하고 나니 한없이 초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 전에 없이 편안한 잠을 이뤘다.


  김찬호 교수는 저서 『모멸감』에서 모멸감과 수치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삶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결국 인간은 무(無)로 돌아간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 (중략) …‘노바디’라는 근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을 때 우리는 자유롭게 남을 대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 살아 있는 만남을 향유할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말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272쪽.


  사실 우리는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아주 같잖은 존재일 뿐이다. 자존감은 없으면서 알량한 자존심으로 속 빈 고개만 빳빳하게 들고 있다가는 언젠가 부러지고 만다. 같잖은 자존심 따위를 지키겠다고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보다 인정하는 것이 튼튼한 자아를 만드는 길이다. 그러면 그때는 같잖지 않은 내게 박수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남들과 ‘같지 않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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