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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곰 Oct 23. 2019

잔망스런 이야기 23

열차

비 오는 날, 고속열차를 타면 빗방울이 옆으로 흐른다. 

종알종알 빗방울 올챙이들이 줄을 맞춰 창문을 헤엄친다. 네 시간 거리를 두 시간도 안 돼 도착하는 건 좋지만,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흐르는 빗방울은 어색하다. 속도가 빨라지니 안 보일 것 같지만, 오히려 체감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가속이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리라.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모르면서도 느끼는 시간...  야속한 올챙이들...     




토요일 점심때, 지하철을 탔다.

서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의자는 거의 다 찼다. 등에 백팩을 멘 할머니 한분이 건너편 칸에서 이 칸으로 오신다. 손에는 양말을 들고 계신다. 목이 긴 것, 짧은 것, 덧신 까지. 양말 사라는 할머니 소리에 모두들, 하던 그대로 휴대폰만 보고 있다. 할머니도 목청을 높이시지는 않는다. 바로 옆으로 오시기에 마침 들고 있던 지갑에서 천 원을 드리고 양말을 골랐다. 할머니가 교회에서 나온 거라, 다 품질이 좋다고 하신다. 양말 사이즈가 좀 큰 것 같아, 아래 하얀 덧신을 집었다.    


“잉, 그것은 나이킹(나이키)이라, 천오백 원...”    


웃으며, 파란 줄무늬 양말로 바꿔 들었다. 할머니는 옆자리에 앉으시더니, 정말 고맙다고 하신다. 많이 파시라고 하니, 금방 웃으며 옆 칸으로 가신다. 

이 적은 돈을 쓰는데, 왜 생각이 많아질까. 지하철이나, 술집에 물건을 들고 오시는 분들이 보이면 으레 마음이 불편해지고, 눈을 피하기 일쑤다. 대부분 큰돈이 드는 물건이 아님에도 그렇다. 그러려고 온 장소가 아니고, 계획에 없던 물건이라 그럴까. 거기다가 팔아주지 않으면 괜히 미안해지고,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불편하고, 그 불편해지는 마음이 싫어서, 또 불편해지는 것이다. 아, 인간이란...    




꽃시장에서 산 꽃을 한 아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신문지에 돌돌만 꽃들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도 정신이 없었다. 꽃시장이 오전이면 끝나서 좀 일찍 서둘렀더니 피곤하기도 해서 너부러져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앳된 커플이 보였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 친구들이 예뻤다. 꼭 잡은 두 손이 귀엽다.     


“... 지갑 떨어졌어요”    


커플 중. 남자 친구가 나를 보고 그런다. 아, 그제야 지갑을 찾아보니, 없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신문지에 싼 꽃들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 남자 친구가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오더니 지하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의자 밑으로 굴러들어 간 내 지갑을 주워주곤 다시 자리로 간다. 어찌나 고맙던지... 꽃 중에 최고는 인(人) 꽃이란 어른들 말씀이 맞다.    




어릴 때, 엄마랑 열차를 탄 적이 있다.

지루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나는 거 보면 무궁화호였던 것 같다. 어딘가를 지나는데, 저만치 앞 쪽, 어떤 건물 뒤에 선 남자가 ‘옷을 홀랑 벗고' 열차를 보며 만세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꽤 있어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체인 것만은 확실했다. 왜 저러냐 저 인간... 하루에 몇 번이나 저 짓을 할까, 열차 시간표는 쫙 꿰고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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