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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곰 Oct 08. 2019

잔망스런 이야기 22

변수

부모님은 고향이 같다. 아빠는 소재지 근처에서 컸고, 엄마는 좀 더 들어간 골짜기 마을에서 컸다. 엄마가 풍성한 땋은 머리를 늘어트린 처녀 시절,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푸는데, 낮은 돌담 밖에 서 있던 총각 아빠가 소리쳤다.    


“난 왜 안돼요?”

“... 약혼자 있잖아요!”    


그렇다. 아빠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임자 있는 몸이면서 엄마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아빠의 약혼자는 학교 여선생님이었다. 아빠는 파혼을 하고 정식으로 혼사를 청해왔다. 외할머니는 결사반대였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고, 시집들 갔지만 시누가 셋이나 있고, 결정적으로 백수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엄마도 별 생각이 없었다. 단지,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 연극에 출연했던 아빠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기억이 나더라고 했다. 아빠의 친척 여동생이었던 엄마 동창이 저기 잘생긴 남학생이 자기 오빠라고 자꾸 보라고 했단다. 아빠는 어떤 지점에서 파혼을 결정하고 엄마에게 돌아섰냐는 물음에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리셨다. 그렇게 물 건너갈 것 같던 혼사는, 외할아버지라는 막강한 구원군을 만나게 된다.     


사실 할아버지는 아빠가 13살 때 돌아가셨다. 난리통(6.25)에 산에 숨어있다 내려온 사람들을 사랑방에 머물게 해 줬는데, 못 먹고 약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돌림병 같은 것이 돌았고, 할아버지도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문중 산인 마을 뒷산에 묻지 못하게 했다. 돌림병으로 죽었단 것이 이유였다.  


“내가 이걸 잊을 것 같아? 당신들 가만 안 둘 거야. 다, 가만 안 둔다고!”    


결국 할아버지를 문중 산에 묻지 못한 13살 아빠는 동네 사람들에게 울분에 차 소리쳤다. 그 자리에.... 외할아버지가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아빠를 보며, ‘어린놈이 뭐가 돼도 되겠다’ 싶으셨다며, 이놈이 그놈이란 걸 알고는 혼사를 밀어붙이셨다. 아빠는.... 딸을 고생시키는 사위가 됐다. 할아버지의 묘는 문중 산으로 이장됐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한 얼마 후,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간, 아빠의 전 약혼자, 여선생님이 보낸 편지였다! 엄마는 편지를 열어볼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더란다. 그래서 아빠에게는 말도 안 하고 가지고만 있었는데 편지가 또 왔고, 또 왔다. 안 되겠어서 어느 날 엄마는, 욕을 했으면 먹겠단 각오로 편지를 열어봤다. 편지의 내용은... 잘 살라는 축복의 말이었다. 행여나 자신을 신경 쓰거나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자신이 지뢰를 피했단 사실을 정녕 아셨던 게다) 축복의 편지는 점차 자신의 일상사를 얘기하는 것으로 넘어갔고, 그렇게 꽤 오랫동안 편지가 왔다. 엄마는 한 번도 답장을 한 적은 없지만 편지 받는 재미가 있었다고 했다.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편지가 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여선생님도 결혼을 한 것 같더라고 엄마가 그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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