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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Dec 31. 2020

나의 삶도 나만의 아름다운 음악이 되기를

영화 <소공녀>(2017)  리뷰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거야"


<소공녀>(Microhabitat) - 전고운 감독, 2017.




1.     삶의 흔적과 음악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라는 영화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미소생물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말로, 쉽게 말해 ‘아주 작은 집’이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도 ‘미소’이다. 영화의 원제목도 작은 공주라는 뜻의 ‘소공녀’인 것을 보면 ‘미소’라는 이름은 작다는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미소는 “작다”는 말과 크게 관련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집이 ‘작다’라는 말보다 ‘없다’라는 말이 맞고, 욕심이 ‘작다’는 말보다는 ‘만족’한다는 말이 어울린다. 사회에서 미소가 차지하는 크기 역시 ‘작다’기보다 미소는 사회라는 틀을 ‘벗어나고’ 있다. 영화에서 미소라는 이름에 내포된 ‘작다’는 말은 ‘작은 범위’라 해야 영화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르고, 보편적인 삶의 기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미소를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인 큰 범위에서 바라보지 말자는 것이다. 그저 ‘미소’라는 작은 범위에서 미소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미소와 미소 친구들의 단편적인 삶의 모습들, 그들의 말과 행동, 순간적인 결정들을 ‘작은’ 미소의 시선에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가 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 미소를 향한 ‘작은’ 범위의 시선을 영화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미소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조금씩 흔적을 남기고 있다. 미소의 삶에 다른 누군가가 남겨 놓은 흔적들도 저버리지 않는다. 미소의 작고 소중한 삶의 흔적들에 집중하며 볼 때 미소의 삶이 마치 음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적 예술작품인 음악은 굳이 응시하지 않아도, 손을 뻗어 체험하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위스키와 담배, 애인 한솔이만 있으면 된다는 미소의 삶은 작고 소중한 흔적들이 만들어낸 음악과도 같다. 정지한 채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소가 세상에 남긴 작은 흔적을 모아 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끝나지 않고 현존하는 노래가 되는 것이다. 영화가 미소를 그려내는 방식 자체도 일종의 음악이다. 미소 친구들 각각의 삶을 미소의 작은 시선에서 서술하고 그런 작은 노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큰 노래로 느껴진다.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불멸의 음악. 작은 흔적들을 이 세상에 남겼기에 결코 끝나지 않을 미소의 음악. 영화는 그런 작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곧 영원한 음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소공녀> 스틸컷


2.     삶의 흔적과 ‘나’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가 삶에 남긴 흔적들은 대부분 미소가 직접 남긴 것이다. 미소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음악으로 완성시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 안전한 집은 미소의 취향이 아니다. 미소가 삶에 남기고 싶은 흔적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미소는 자신이 지금껏 만들어 온 음악의 멜로디가 끊기지 않기 위해 집을 포기한다. 위스키, 담배, 애인 한솔이라는 미소의 취향 그리고 미소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집을 포기한다. 미소는 당분간 친구들의 집에서 며칠씩 잠을 자고, 마지막 장면에는 한강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잔다. 언제 어디서든 잘 수 있는 텐트가 그녀의 집이 되었다. 미소는 담배, 위스키 그리고 애인을 자신의 삶에서 지키기 위해 집을 포기했다. 미소의 친구들도,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도 미소의 결정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내 집 마련’이 일평생 꿈이 될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집’은 중요한 공간이다. 나의 안전을 지킬 수 있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고, 편히 쉬고 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온전히 내 소유인 집을 구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평생 모은 돈으로 집을 사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대출을 이용해야 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집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집이라는 공간이 정말 나의 취향인가? 진정으로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취향이라는 것이 내게 존재하는가? 미소에게는 자신의 삶의 흔적이면서 취향인 담배, 위스키, 애인보다 집이 덜 중요하다. 누구보다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미소가 취향이 아닌 집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소에게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솔직히 요즘 집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르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잠시 집을 나왔지. 

…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인가?” 

- 영화 <소공녀> 중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 자신이 삶에 남긴 흔적들을 기준 삼아 할 일을 결정하는 것.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런 삶은 종종 비판 받기도 한다. 친구들의 집에서 잠을 자는 미소를 향해 “염치 없다”고 말하는 친구 정미가 있었다. 정미는 미소에게 백만원 수표를 던지며 집에서 나가라고 말한다. 미소에게 백만원이란 매우 큰 돈이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존중하는 미소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정미의 집을 떠난다. 사실 정미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 간다. 오롯이 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 때 내가 속한 사회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미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미소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온전히 주체적인 나의 삶을 찾았을 때 타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미소는 그럼에도 하모니를 잊지 않으려 한다. 


<소공녀> 스틸컷


3.     삶의 흔적과 하모니


 인간의 삶은 결코 독립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타인의 영향을 받고 있고 나 자신도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도 온전히 우리의 것만은 아니다. 항상 무언가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 관계가 화성적이라면 하모니가 만들어질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들어진 하모니가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이다.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서는 개개인의 연주가 중요하다. 연주자들의 합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즉흥적이면서도 계획적인 솔로 파트들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때, 솔로 파트는 각 연주자가 자신의 악기와 연주에 대해, 음악에 대해 확신이 없으면 전체적인 음악의 흐름과 맞지 않는 연주를 하거나 아예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흔적도 마찬가지다. 항상 타인의 시선에 의해 움직이고 나 자신의 취향이 없는 채로 타인 또는 사회의 취향에 맞추어 살다 보면 오히려 수많은 사람과 함께 연주해야 하는 삶에서 솔로 파트를 연주할 수 없게 된다. 음악 작품 안에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내 삶의 흔적들도 스스로가 남긴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남기고 간 것들이 대부분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 두어서는 안 된다. 미소는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으로 삶을 유지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는다. 미소에게 좋은 추억이었던 소중한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또한 도움을 준다. <소공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고립되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하모니를 잊지 말라는 충고를 해 주는 것 같다.


<소공녀> 스틸컷


 영화에서 서술되는 미소 친구들의 삶은 우리나라 사회 모습과 다르지 않다.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 정미, 아내와 이혼하고 넓은 집에서 빚쟁이로 살아가야 하는 하우스푸어 대용, 홀로 고된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 현정, 포도당을 맞아가며 일 하는 문영, 집안의 대를 잇고 가정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미소를 감금하는 록이. 영화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집을 포기하고 한강에서 텐트 치며 살아가는 미소의 삶은 비현실적이라고 할지 몰라도, 미소 친구들의 삶은 관객들이 경험하고 있는 삶이다. 이들이 각각 삶에서 남긴 흔적들은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흔적들이 쌓이다가 무너지고 새로 쌓이다가 무너져서 아무런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과연 이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들은 다를까? 


 한국은 특정 집단만 차별 받거나 억압받고 있지 않다. 각각 모든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로 차별 받는다. 수많은 집단 또는 개인이 차별 속에 있다. 무한한 경쟁 사이에서 자아를 찾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좇아가다가 어느 누구도 개별성, 고유성을 지니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소공녀>의 미소가 보여주는 삶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스스로의 음악을 만들고 타인과의 합주를 꿈꾸는 미소의 삶을 구경하다 보면 관객 자신의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남긴 삶의 흔적들은 정말 나 자신의 취향인지, 혹은 타인의 손에 이끌려 남긴 흔적인지, 내가 만들고 있는 나의 음악은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보다 주체적인 삶, 오롯이 나로 이루어진 삶, 그러면서도 하모니가 만들어지는 삶을 꾸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또한 그런 내가 되기를 바란다. 




<소공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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