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나로 소통할 수 있기를

by Heniverse 심혜린


나이에 비해 기업강의를 일찍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기업강의랄지 출강이랄지, 우연히 S대학교에 처음 특강을 나간 게 5년전인 27살 때(윤석열나이 미적용)니까.


사실 그 때 당시엔 나랑 나이도 비슷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는 것에 '이래도 되는건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 부적격함에 대한 자기의심은 5년후에도 비슷했다. 나는 교안 만드는 걸 정말 싫어해서 에이전시 사업으로만 빠지려고도 노력했고, 선생짓을 하며 고리타분해질 나자신이 걱정되어(내 향상될 꼰대력이 진심으로 우려됐음) 이 일과 인연을 끊으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기가 막히게 잊을만하면 한번씩 기관에서 강의 의뢰가 왔다.


그러나 두려웠다. 출강을 하는 곳의 규모는 학교에서 관공서, 대학병원, 학술대회 급으로 점점 커지는데 나라는 인간은 그대로였다.


강연단에 오르기 전 항상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내용을 전달하는 나자신이 기계적이라고 느껴졌다. 적당히 자격이 있는 사람인 척, 당신들보다 혹은 만큼 성숙한 사람인 척, 충분히 익은 사람인 척하며 허용가능한 범위 내에서 어긋나지 않는 사람으로 기능하려 노력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적인 인간, 기계로서의 인간으로 업을 대한거다.


잘못되지 않게 적당히 하면 돼 라는 적당주의.


그러다 문득 얼마전 우리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상급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맥락에서 당연히 나올만한 말이었지만 내 입장에선 너무나 형식적이며 사회적인 의례를 우선시하는 표현법이라고 느껴졌다.


예전같았으면 별 문제의식 없이 넘어갔을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앞으로 그런 표현은 절대 쓰지 않겠다라고 다짐하였다.


나의 진심보다는 사회의 기준을 우선시 생각하는, 사회의 기준에서 '틀리지 않게' 적당히 이렇게 처세하면 되는 것이며, 인간대인간으로서의 진심으로 다가가기보다 '-한 상황에선 -게 해야 된다/해선 안된다'라는 당위성이 강제되는 사회적 소통의 습관.


이러한 습관이 나에게는 없었는가?


내가 몸의 감각을 활용하는 성우라는 일로만 도망을 칠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평가받기 싫다, 나도 너를 평가하기 싫다, 강제적인 의사소통은 하기싫다, 그러니 아예 시작조차 안하겠다.


라는 일종의 강력한 반발심이었으며 반항이었던 것이다.


강의장의 청중이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무의식적 신념의 결집체처럼 앞에 앉아있다고 여기니 나는 당연히 그 업을 바라보는 태도가 생생히 살아있지 못했다. 나는 나를 주체가 아닌 객체, 도구로 보았다.


다행인 건 1달동안 이곳저곳 돌며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인간대인간의, 마음으로 하는 소통의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 그를 통해 한국에서의 삶에서도 조금 더 마음을 연 '안녕하세요'와 스몰토크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


앞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을 더 많이 해야할 것 같은데, 인간을 상대할 때 나의 뿌리깊은 잘못된 신념들부터 뜯어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틀리다 보다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 말하는 걸 자연스러워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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