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는가, 쌓이는가

흐르는 강물 위에서, 쌓이는 지층을 딛고

by Henri

호흡이 고요해질 때 시간은 시계보다 먼저 몸으로 온다.

들숨이 가슴을 채우고 날숨이 흩어질 때 문득 묻는다.

지금 이 순간은 나를 스쳐 지나가는가,

아니면 내 안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나이테를 만드는가.

우리는 시간을 대부분 ‘흐르는 것’으로 안다.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손을 담그면 이미 다른 물이 흐르고,

뒤돌아봐도 방금 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삶도 그렇다고 믿는다.

하루는 저물고 계절은 바뀌며 우리는 어제의 자신과 조금씩 멀어진다.

물리적 세계에서 시간은 분명 그렇게 흐른다.

우리를 미래로 밀어내고 되돌릴 수 없다는 질서로 단단히 묶는다.

그런데 깊은 고요 속에서 귀 기울이면 다른 이야기가 들린다.

여름날의 한 줄기 빛,

누군가 목소리에 묻은

온도, 오래된 공기 냄새.

이미 지나갔지만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다.

오랜 기억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순간 우리는 직감한다.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은 세계의 질서 안에서는 흐르지만,

인간의 내면에서는 침전한다.

우리는 시간을 통과하며 살지만 동시에 시간을 품고 산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무언가를 잃는 동시에 무언가를 축적한다.

이름 없는 감각들,

설명되지 않는 흔적들이 조용히 가라앉아 존재의 깊이를 더한다.

나는 가끔 스스로를 하나의 지층처럼 느낀다.

맨 위에는 오늘의 생각과 감정이 얹혀 있지만,

그 아래에는 켜켜이 압축된 시간들이 있다.

유년의 빛, 닫힌 계절들, 잊었다고 믿었던 찰나들.

그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바닥이 되어 나를 받치고 있다.

그러다 우연한 바람이나 향기 하나가 그 지층을 흔들면,

오래된 층이 조용히 깨어난다.

시간은 단순히 저장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계속 변하고,

현재의 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으로 다시 태어난다.

과거는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빛 속에서 매번 다른 표정을 짓는다.

결국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바깥 세계에서는 수평으로 흐르고,

내면에서는 수직으로 쌓인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 위에 서 있으면서도,

쌓여 온 단단한 지층 위에 서 있다.

삶은 어쩌면 이 두 시간의 균형 위에 머무는 일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쌓여가는 시간의 두께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이해해 가는 일.

하루는 지나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하루는 우리 안에 스며들어 내일의 생각을 살짝 비틀고,

다음 선택의 방향을 아주 미세하게 기울인다.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시간을 뒤따라 걷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품고 걷는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그 느리고 고요한 축적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되어 간다.


이 순간 어리섞은 물음을 다시 해본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는데, 왜 물은 떠내려가고 축축함만 남습니까?"


Henri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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