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적인가, 구원인가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저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빗줄기 하나하나가 땅에 닿는 순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
나는 오래된 물음 앞에 다시 섰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적인가,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 구원인가.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느낀 순간들은,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때와 늘 겹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그 얼굴이 사라질 것이라는 실감이 밀려올 때.
가을 오후,
이유 없이 충만했던 순간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죽음은 추상이 아니라
피부로 스며드는 온기였다.
죽음에 대해 묻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묻는 일이었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 안에 ‘코나투스’
스스로 안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였다.
우리는 살고자 하는 것이 이미 우리의 형태였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존재가 자신의 소멸을 마주하는 가장 솔직한 반응이며,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딜런 토머스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순하게 죽음을 맞지 마라, 노인이여.
분노하라, 분노하라, 사라지는 빛에 맞서.”
그것은 사랑의 시였다.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아들의 간절함이었다.
그 앞에서 죽음은 분명 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 지점에서 머뭇거렸다.
모든 삶이 살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 잠긴 삶,
기억을 잃어가는 삶,
사랑과 의미가 이미 떠나버린 삶.
그런 삶에게 죽음은 적일까.
치료라는 이름으로 연장되는 고통은 삶인가,
아니면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만든 또 다른 잔인함인가.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다.”
그 말은 해방이 아니라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없는 것을 두려워하느라 있는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
쇼펜하우어는 더 깊은 어둠에서 말했다.
삶은 맹목적 의지가 만들어낸 끝없는 고통의 쳇바퀴라고.
그에게 죽음은 적이 아니라 긴 잠이었다.
자아의 소멸이 내려놓음인 순간.
나는 그 시선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죽음이 구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때로 조용한 진실로 다가왔다.
호스피스 의사가 남긴 말처럼.
“어떤 죽음은 잔인하게 늦었다.”
하이데거는 그 모든 이분법을 넘어섰다.
그에게 죽음은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였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자라나는 가장 내밀한 가능성이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그 자각이 삶을 바꾼다.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그것도 혼자 죽는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군중 속에 녹아드는 삶에서 깨어난다.
죽음의 자각이 삶을 선명하게 만든다.
죽음이 없다면 시간은 무한할 것이고,
모든 것은 무게를 잃는다.
오늘 이 저녁이 소중한 것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한함이 삶에 밀도를 부여한다.
벚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짧기 때문이다.
카뮈는 말했다.
삶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답을 주지 않는다.
죽음은 그 부조리의 완전한 증명이다.
그 앞에서 그는 반항을 선택했다.
시지프스.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형벌.
그것이 다시 굴러 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다시 미는 것.
카뮈는 말했다.
“시지프스는 행복해야 한다.”
패배가 예정된 싸움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발명해 낸 가장 아름다운 존엄이었다.
죽음이 이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 하루를 사는 것.
그것은 다른 종류의 승리였다.
비가 그쳤다.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빗물에 씻긴 흙냄새와 은은한 꽃향기.
나는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있는 내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 사실이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죽음은 적인가, 구조인가.
이 물음은 하나의 답으로 닫히지 않는다.
삶이 고통이라면 죽음은 구조이고,
삶이 사랑이라면 죽음은 적이다.
삶이 유한하기에 의미를 가진다면 죽음은 삶의 조건이며,
삶이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라면 죽음은 그 여정의 완성이다.
결국 이 물음은 각자의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은 다른 얼굴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계속 물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삶 쪽으로 걸어가는 일이다.
나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밤공기가 계속 들어오게 두었다.
사라질 것들을 사라지기 전에 조금 더 느끼고 싶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밤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