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다면 삶은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유한성의 온기

by Henri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이 있다.

서랍 깊숙이 접혀 있던 그것을 펼치는 순간, 나는 한참 손을 떼지 못했다.


사진 속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나도 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 세상에 없고, 일부는 그 웃음을 잊었으며,

그 오후의 빛은 다시는 그 각도로 기울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아는 누군가가 지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만약 그 오후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그 웃음들이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면.

죽음도, 이별도 없고, 모든 것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이 사진은 지금처럼 나를 이토록 오래 붙잡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이 한동안,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마음에 걸렸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불렀다.

그는 죽음을 통해 삶을 포기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온전히 살아내게 하려 했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에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진지하게 대면한다.

죽음은 위협이 아니라, 우리를 현재 속으로 밀어 넣는 힘이다.


벚꽃을 생각한다.

해마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꽃이 예뻐서만이 아니다.

곧 지고 말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피어 있는 꽃 앞에서는 아무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유한성은 삶의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삶에 질감을 부여하고 무게를 주는 조건이다.

끝이 없다면 ‘지금’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이 생각을 더 밀고 나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멈칫하게 된다.

의미가 전적으로 죽음에서 온다면,

그것은 너무 수동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상실이 있기에 사랑이 빛난다는 논리에는

어딘가 공허한 울림이 있다.


카뮈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세계가 우리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했다.

우주는 침묵하고, 사람은 이유 없이 태어나 죽는다.

그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해야 한다고, 반항해야 한다고.


시지프스는 죽지 않는다.

영원히 바위를 굴려야 하는 형벌 속에서

카뮈는 조용히 선언한다.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러나 불멸을 진짜로 상상할 때,

진짜 두려움은 다른 곳에서 온다.

스위프트가 그린 스트럴드브럭들은

영원히 산다. 그러나 계속 늙는다.

기억은 허물어지고, 사랑하던 얼굴들은 지워진다.

반복이 쌓일수록 세계는 점점 투명해지고,

마침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더 날카롭게 말했다.

삶이 삶인 것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존재는 결국 모든 욕망을 소진한다.

엔진은 돌아가는데 기어가 맞물리지 않는

공회전의 상태.

그것이 영원한 삶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스피노자는 의미를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이성과 사랑,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감각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영원의 관점에서 보기’는

불멸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작은 점이 거대한 연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깊이 감각하는 일이다.


불교도 같은 자리에 서서 말한다.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그 가르침은 허무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깊이 받아들일 때,

지금 이 순간의 ‘있음’이 더 선명해진다.

지금 이 숨, 지금 이 빛,

창밖을 스치는 바람

이것들은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오래 돌아서 나는 결국 이 자리에 섰다.


끝이 없다면 삶은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가 반드시 죽음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를 만들어온 방식

사랑하고, 선택하고,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붙잡는 것

이 모든 것이 유한성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삶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다.

언젠가는 이 손이 멈추고,

이 생각을 하는 사람도 사라질 것이다.

그 사실이 쓰는 이유를 빼앗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쓰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자리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이렇게 가깝게 만든다.


사진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나를 붙잡은 것은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오후에 온전히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이다.

끝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웃을 수 있는 것.


끝이 없다면 그 웃음은 아마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이 웃음,

덧없음과 온기가 함께 있는

이 웃음이

여전히 더 좋다.


사진을 다시 접어 서랍에 넣는다.

그것은 거기 있을 것이다.

나보다 조금 더 오래.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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