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꽃 앞에서
벚꽃이 지는 것을 보며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을 느꼈다.
아름다워서 슬픈 것인지, 슬퍼서 아름다운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꽃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멀어지는 순간, 문득 생각했다.
저 꽃이 영원히 피어 있다면, 나는 지금처럼 가슴이 저릴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은 소멸을 전제로 한다.
존재의 깊이 또한 마찬가지다.
평범한 오후, 밥을 먹고 있었다.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 지식이 아니라 감각으로 다가왔다.
밥알의 촉감, 창으로 들어오는 빛, 냉장고의 낮은 소음까지 모든 것이 낯설게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또렷함 뒤에 조용히 서 있는 한 문장.
“언젠가 나는 이것들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두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각성이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불렀다.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각자에게 완전히 고유한 사건이다.
삶의 대부분은 대신할 수 있지만, 마지막 순간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나만의 영역이다.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끝은 빼앗는 동시에 되돌려준다.
그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기준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가.”
일상은 이 질문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는다.
우리는 바쁘고, 연결되어 있고, 끊임없이 반응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인(das Man)’ 속에서 우리는 안도한다.
근본적인 질문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무감각 속에서.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다.”
그 말은 공포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밀도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계의 인식이 현재를 선명하게 만든다.
끝을 생각하는 것과 끝에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일상을 정련하고, 후자는 일상을 잠식한다.
몽테뉴는 낙마 사고 이후 글의 온도가 달라졌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수식을 늘어놓지 않았다.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았고, 포도주의 맛, 우정의 감촉, 사소한 기쁨을 담백하게 기록했다.
한계를 인식한 뒤에야 사물이 구체성을 얻는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았다.
출세하고, 가정을 꾸리고, 무난했다.
그러나 병이 찾아오자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혹시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그는 물었다.
“나는 무엇을 사랑했는가. 나는 진짜로 살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그 질문에 도달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친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메멘토 모리’는 강박이 아니다.
무게를 얹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잠시 멈추라는 권유다.
한계를 느끼고,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라는 뜻이다.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사유가 오히려 하루를 더 또렷하고 소중하게 만든다는 것을.
한계가 있기에 오늘의 빛이 빛나고, 언젠가 헤어질 수 있기에 관계가 깊어진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죽음을 전제하지 않는 삶은 시간을 무한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미룬다.
중요한 일도, 중요한 말도, 중요한 사람도.
삶은 계속 시작되지만, 깊어지지는 않는다.
다시 봄이다. 벚꽃은 지고 바람은 분다.
꽃이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계절이 끝나기 때문에 지금이 아깝다.
그 인식은 슬픔이면서 동시에 가장 선명한 각성이다.
성숙이란 아마 이런 태도일 것이다.
조건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한계를 인정한 채 스스로에게 묻는 것.
질문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밥 한 끼, 꽃 한 송이, 평범한 오후 한 순간이면 충분하다.
끝을 생각하지 않아도 하루는 지나간다. 어쩌면 더 편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안함과 깊이는 같은 말이 아니다.
꽃은 피는 순간만으로 계절이 되지 않는다.
지는 순간까지 있어야 하나의 완전한 계절이 된다.
우리의 시간도 그러하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