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않는 시간도 삶이었을까

번역되지 않은 채로 남는 것들

by Henri

우리는 태어난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첫 숨, 처음 스며든 빛, 누군가의 품에 안겼던 온기.

그 모든 순간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

잃어버렸다는 자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사진을 넘기다 보면 문득 멈칫한다.

사진 속 아이는 분명 나인데, 나는 그 아이를 모른다.

그 아이는 더위를 느꼈을 것이고,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고, 이유 없이 서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감정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 아이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어쩌면 그 아이 자신일지도 모른다.


존 로크는 인격의 연속성이 기억에 있다고 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의 나는 ‘나’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운 결론이다.

삶이 그렇게 선명한 경계로 나뉜다면, 우리의 존재는 생각보다 얕을 것이다.


기억은 삶을 보존하지 않는다.

기억은 해석이다.

반복될수록 윤곽이 흐려지고, 없던 장면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억은 증거가 아니라 편집이다.


잠이 그 사실을 가장 조용히 증명한다.

우리는 매일 밤 의식을 내려놓는다.

깊은 수면 속에서 ‘나’는 사라지지만,

심장은 뛰고 폐는 숨을 쉬며 몸은 스스로를 돌본다.

우리는 그 시간을 삶에서 빼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 밤을 살았다고 말한다.


베르그송은 삶을 끊임없는 지속(durée)으로 보았다.

의식은 그 흐름 위에 선을 긋고 이름을 붙이지만, 흐름 자체는 구분을 모른다.

강물은 어느 물결이 다른 물결인지 따지지 않는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흐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 살 이전의 시간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흔적은 더 깊은 곳에 새겨진다.

처음 안긴 온기, 배고픔을 달래준 손길, 낯선 세계를 향해 뻗었던 작은 손.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가장 근본에서 빚어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 친밀함을 견디는 힘, 세상을 안전하거나 위태롭게 느끼는 감각.

모두 그 기억되지 않는 시간에서 비롯되었다.


다니엘 카너먼은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를 구분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보다,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따라 삶을 평가한다.

마지막 한 장면이 전체를 뒤덮고, 평범했던 시간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순간들도 분명 존재했다.

햇빛의 온기, 스치던 바람, 이유 없는 마음의 흔들림.

그 순간들은 목적 없이, 계산 없이, 완전하게 존재했다.


기억은 삶을 붙잡지만 동시에 번역한다.

번역된 삶은 이해하기 쉬워지지만 생생함은 사라진다.

기억되지 않은 것들은 번역되지 않은 채 남는다.

우리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기억되지 않는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몸의 태도와 습관,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또렷이 읽지 못할 뿐, 그 위에서 지금도 걷고 있다.


기억되어야만 삶인가.

기록되어야만 존재인가.

이름이 없어도, 증명이 없어도, 흐름은 이어진다.

강물은 지나온 자리를 기억하지 않지만,

그 흐름이 없었다면 강바닥의 모양은 달라졌을 것이다.


기억은 넓은 대지 위에 드문드문 켜진 불빛일 뿐이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도 분명 대지다.

어둡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억되지 않는 시간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리고 삶의 대부분은 아마 그 바깥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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